회색 서울 들추니 거리마다 '작품'들이…

도시 예술 산책
박삼철 지음｜나름북스｜411쪽｜2만원

서울 신교동 서울농학교와 서울맹학교는 담장이 '예술'이다. 이 지역에 작업실이 있는 작가 배영환(43)씨가 2007년 청각장애 학생 180명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그림이나 글로 써서 벽화로 만들자고 제안하고 3주간 학생들과 함께 그린 작품을 도자 타일로 구워 높이 1.2m, 폭 32.1m짜리 벽화로 탄생한 것. 그러자 바로 옆 서울맹학교에서 '민원'이 제기됐다. "우리도 해달라." 이듬해엔 시각장애 학생 173명이 손바닥을 양각으로 뜨고 점자로 하고 싶은 말을 새겼다. 장애 학생들과 세상을 갈라 놓았던 담장이 예술이자 소통의 도구로 탈바꿈한 것이다.

'왜 공공미술인가' 등의 저서와 역서를 펴낸 공공미술 전문가인 저자(서울디자인재단 DDP서비스디자인팀장)는 전시장 밖으로 나온 미술이 얼마나 가까이서 따뜻하게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지 147점의 거리 미술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면, 박삼철씨는 '걷는 만큼 보인다'를 모토로 도심의 빌딩 앞과 골목길, 달동네 계단, 지하보도를 훑는다. 그 결과는 완보(緩步)로 완상(玩賞)하는 기쁨이다.

인구의 80% 이상이 도시에 사는 2012년의 대한민국. 도시는 삭막함을 벗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형 건축물의 건축비 1%를 미술품 구입에 사용하도록 한 이른바 '1%법' 이후로 '공해'라는 비난까지 받았던 공공미술이 지자체와 예술가, 주민의 노력으로 달라지고 있는 현장을 이 책은 보여준다.

대표적인 거리는 서울의 정동과 광화문 일대.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빌딩 앞엔 키 22m, 몸무게 50t짜리 철인(鐵人)이 1분 17초마다 한 번씩 망치질을 하고 있다. 조나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 서울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공미술로 뽑힌 작품이다. '해머링 맨' 바로 앞의 버스 정류장도 '작품'이다. 하태석씨가 스테인리스스틸과 LED 조명으로 꾸민 'Flow'가 있고, 길 건너 맞은편엔 한옥 처마의 곡선을 닮은 최욱씨의 아트 정류장이 있다. 발걸음을 옮기면 돈의문 터의 삭막한 축대를 나무와 LED, 강화유리 등을 이용해 멋진 벽으로 만든 안규철씨의 '보이지 않는 문'이 있다. 그 밖에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최병훈씨의 의자 작품들과 이환권씨의 조각작품 '장독대', 작곡가 이영훈을 기리는 노래비 등이 즐비하다.

소박한 관심과 사랑, 아이디어도 도시를 빛낸다. 서울 명륜동에는 김을씨와 안규철씨의 작품 '하늘 계단'이 있다. 평범한 계단에 '하늘 15/165' 식으로 전체 계단 중 어느 위치까지 올라왔는지 이정표를 붙이고, 중간중간에 푸른색 반점으로 구름을 그려 '구름 밟고 올라가는' 느낌이 들도록 만든 것. 서울 강북구 인수초등학교 옹벽엔 높이 5m짜리 초대형 피아노 건반이 있다. 건반에 매달린 줄을 당기면 종처럼 울림통을 울리면서 소리가 나는 '꿈꾸는 피아노'라는 제목의 정연택씨 작품이다. 서울 화동 정독도서관에 가게 되면 축대 하나, 담벼락 하나도 유심히 살펴보자. '작품'이 숨어 있다.

도시는 아니지만 전북 진안의 백운면의 '간판 프로젝트'는 공공미술의 바람직한 진행 방향을 보여준다. 이곳 상점들은 전국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간판을 달고 있다. 돼지와 닭이 그려진 가운데 붓글씨체로 '순대와 통닭' 간판이 걸려 있고, 약방과 정유소 농약사가 함께 쓰는 단층 건물 옥상엔 '흰구름'이란 글자가 올라 있다. 2007년 주민들과 전주대 X-edu사업단, 시민문화네트워크 티팟 등이 공동으로 1년에 걸쳐 마을의 얼굴을 바꾼 것. 저자는 "이곳 간판이 동네 사람들을 똑같이 닮은 것은 예술과 삶이 잘 사귀었고 일상이 예술에 잘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책 말미엔 부록으로 삼청동길, 서촌길, 청계천길 등 9개의 예술 길 안내지도도 실었다. 봄볕 찬란한 거리로 나가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