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동공 연기, 적도의 남자 엄태웅

배우 엄태웅(38). 최근 이 남자 정말 바쁘다. 출연한 영화 '건축학개론'이 350만 관객을 돌파하며 '대박'을 터뜨렸고, 1년2개월째 KBS 예능 프로 '1박2일'을 하고 있다. 주연을 맡은 KBS 2TV 수목 드라마 '적도의 남자'는 동시간대 시청률 1위(15.2%)를 달리고 있다.

'적도의 남자'에서 그는 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됐다가 수술로 눈을 뜨고서 처절한 복수를 준비하는 '김선우' 역을 맡았다. 그는 극 중 초점 없는 눈동자 연기를 선보여 "신들린 동공 연기"라는 말도 듣고, 시각장애인 아버지를 둔 한 여성팬으로부터 "장애를 사실처럼 연기해주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는 트위터 글을 받기도 했다.

세 차례 인터뷰 장소와 시간을 변경한 끝에 지난 23일 서울 옥수동 한 카페에서 만난 엄태웅은 "동공 연기는 눈을 좌우로 벌리고 하기 때문에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할 수도 없었다. 느낌대로 했는데 반응이 좋아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시각장애인 연기를 위해 촬영 전 5일 내내 실제 시각장애인복지센터를 찾았다고 했다. "시력을 잃으신 분들이 지팡이 쓰는 법, 점자 읽는 법 등을 교육받는 과정이 있었어요. 점자를 배우던 한 젊은 친구가 있었는데 저도 그 친구 행동을 보고 함께 배웠죠." 그는 "촬영 내내 눈의 초점을 흐리고 시각장애인처럼 눈알을 굴리느라 눈이 피곤했다"며 "날 생각해서 작가가 선글라스 쓰는 장면을 넣어줬지만, 선글라스를 쓰면 감정 표현이 안 돼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안 썼다"고 했다.

사실 그에게 시각장애인 연기는 부담이었다. "어찌 됐든 시각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흉내 내는 것이잖아요. 잘못해 그분들의 상처를 들쑤시게 될까 조심스러웠어요. 시각장애인 아버지를 둔 한 여성팬이 '고맙다'는 트위터 글을 보내줬는데 그 글을 보고 오히려 제가 더 고맙더라고요."

1998년 영화 '기막힌 사내들'에서 단역으로 데뷔한 엄태웅은 10여년의 무명 생활을 거쳐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지금의 자리에 섰다. "오랜 무명을 겪다 보니 억지 욕심을 안 부리게 된 것 같아요. 꼭 이 배역은 나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고, 내 연기가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제작진·배우들과 소통하고 감정을 교류하며 하는 연기에 재미를 느낄 뿐이에요."

드라마에서는 카리스마를 뿜으며 '엄포스'로 불리지만 사실 그의 실제 모습은 '1박2일'에 비치는 모습과 더 가깝다. 프로그램에서 운동신경이 없고 썰렁한 농담을 자주 해 '엄순둥'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처음에는 고민했지만, 나란 사람을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솔직하게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1박2일 출연을 결심했어요. 배우로서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가 있지만 '배우는 꼭 이래야 해'라는 기준은 세상에 없잖아요. 내가 1박2일 안 한다고 진정한 배우로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작품이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실제 성격은 야들야들하면서도 극 중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잘하는 비결을 묻자, 그는 "캐릭터니까"라고 답했다. "어눌하고 자기표현을 잘 못하는 실제 성격이 캐릭터와 잘 섞여 너무 독하지만은 않은, 인간적인 연민도 우러나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 같아요. 나는 독하진 않지만 뒤를 궁금하게 만들고, 뭔가 비어 있는 듯하면서 어느 순간 정교하게 짜인 그런 느낌이 있는 '과하지 않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이 없는 듯 소박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는 "10년 후 직업란에 배우라고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작품을 시작할 때 자신감이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항상 최선을 다해 연기하지만, 세상이 바뀌어 연기자 생활을 더 못하게 된다면 과감히 생계를 위해 다른 것을 할 각오도 돼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거죠.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