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넘치는데 믿음 안가… "소비에도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필요"

 

 지난달 30일 서울 시내 한 백화점 아웃도어 전문매장. 중년의 한 남성 고객은 등산화 코너를 둘러보다 점원에게 "컨슈머리포트에서 추천한 제품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이 남성은 점원이 가져다준 등산화를 살펴보다 "추천 제품이니 믿고 사도 되겠다"며 자신과 아내의 것까지 두 켤레를 사 갔다. 이 매장 관계자는 "처음 리포트가 발간된 직후 열흘 동안엔 평소보다 두세 배가량이 더 팔렸다"며 "리포트가 나온 지 한 달도 넘었지만 아직도 '추천 제품'을 보여 달라는 고객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정보가 넘쳐나는 빅 데이터 시대,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프로슈머(prosumer)들이 곳곳에 포진한 시대에 소비자들이 '관급(官給)' 정보에 열광하는 기묘한 풍경이다.

'한국판 컨슈머리포트'를 목표로 공정거래위원회가 발간한 K-컨슈머리포트의 파장이 심상치 않다. 첫 보고서가 나온 지 40여일이 흘렀지만 소비자들은 뇌리에 박힌 추천 등산화를 찾고 있고, 수익률이 형편없다고 폭로된 변액연금을 파는 보험사들은 아직 후유증에 시달린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곧 리포트가 나올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은 초긴장 상태다. 공정위가 유모차, 보온병, 프랜차이즈 커피 등에 대해 리포트를 내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관련 업체들은 공정위와 그 산하 기관인 한국소비자원을 상대로 관련 정보라도 얻기 위한 치열한 로비전을 펼치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어떤 단체가 어떻게 조사하는지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기업들의 문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며 "소비자들의 문의도 폭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18개 국내 시중은행장들이 모인 조찬 간담회에서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컨슈머리포트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소비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지 못했고 투명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가격 비교 사이트와 동호인 카페, 포털 지식문답코너, 트위터에 정보가 넘쳐나는 빅 데이터 시대에 왜 정작 필요한 정보가 부족한가.

◇넘치는 정보, '애정남'이 필요해

전문가들은 가장 큰 원인으로 '빅 데이터(big data) 시대의 감당할 수 없는 정보량'을 꼽는다. 삼성경제연구소 채승병 수석연구원은 "IT 기술 발전과 모바일 환경의 확대로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소비자들이 기존의 관리 체계로는 도저히 정보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막대한 정보에 휩쓸려 혼란스러운 소비자들에게 K-컨슈머리포트가 단칼에 명쾌한 답을 내려주는 '애정남'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믿을 만한' 정보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유통망이 다양해져 같은 물건의 값도 천차만별이 되면서 전통 경제학의 기본 원칙인 일물일가(一物一價) 법칙이 깨지고 소비자들의 가격에 대한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손해를 보고 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은 더욱 커졌고, 소비자들은 하루 종일 인터넷을 뒤진다. 그런데 믿을 만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니 소비자들의 정보 갈증이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애정남'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일부 소비자단체가 오래전부터 컨슈머리포트와 비슷한 보고서를 발간해왔고,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다른 사용자들의 제품평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K-컨슈머리포트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적은 별로 없었다.

이와 관련해 K-컨슈머리포트가 나온 시점이 '신뢰의 진공'과 비슷한 상태였다는 해석도 나온다. 연세대 경영학과 이문규 교수는 "소비자들이 인터넷 정보를 이웃이나 친구의 입소문처럼 신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파워블로거 사건'(파워블로거들이 업체로부터 돈을 받고 홍보성 글을 올렸다가 적발된 사건) 등으로 인터넷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공신력 있는 정보에 대한 갈증이 커진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믿을 수 있는 소비 정보'가 돈이 된 지 오래다.

미국 소비자연맹이 발간하는 월간지 '컨슈머 리포트'는 온라인 1년 구독료가 30달러인데도 구독자가 700만명이 넘는다. 나스닥에 상장된 앤지스리스트(Angie's list)는 주택 리모델링 관련 정보에 특화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입소문의 지혜를 담는다'를 모토로 한 이 회사는 지역별 리모델링업체나 건설업체에 대한 일반인들의 상품평을 모아 돈을 받고 제공하는데, 유료 가입자 수가 150만명에 이른다.

☞빅 데이터(big data)

기존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이 수집·저장·관리·분석할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설 만큼 거대해서 통제하기 힘든 데이터 집합 또는 이를 분석하는 기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