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사람의 도리, 부모의 도리
입력 : 2012.05.03 23:20
아버지 이마 언저리 깊게 팬 흉터 부상 동료와 징용 탈출하다 생겨
그렇게 사람의 도리를 지키듯 고단한 삶 속 자식들 공부시켜
'거슬려도 속으로 삭이며 살았다' 예순 넘어서야 先親 속내 깨달아
어릴 적 아버지 이마 언저리에 깊게 팬 흉터가 항상 궁금했다. "왜 그런 게 생기셨어요?"라고 여쭤볼 때마다 아버지는 "왜정(倭政) 때 징용 가서 생긴 일이야…"라며 말끝을 흐리시곤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 흉터가 생긴 연유에 대해 내가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건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일제강점기 말기 아버지는 고향인 경남 양산에서 조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계셨다. 그분들은 소작농이었다. 전쟁이 길어지자 일본인 관리는 "감자를 심지 말고 군수품인 면화를 심으라"고 독촉했으나 가족의 생계가 달린 일이었기에 감자 농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밉보인 아버지는 졸지에 주재소로 연행됐고, 이것이 그만 징용으로 이어지게 됐다.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끌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어느 산속이었다. 도로를 내고 석재를 캐는 공사 현장이었다. 이미 수백 명이나 되는 조선인 노무자들이 '보국대(報國隊)'라는 미명하에 끌려와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다. 작업 여건의 열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움막 같은 숙소에서 잠을 자야 했고, 길에 버려진 감자 껍질을 주워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무엇보다도 노무자들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일본인 감독들이 다반사로 행하는 구타였다.
초가을 어느 날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데도 작업 지시가 떨어졌다. 모두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격분, 집단 항의에 나섰다. 이것을 난동으로 여긴 일본인 감독들은 각이 진 몽둥이를 무자비하게 내리치며 해산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인 노무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폭력사태로 번졌고, 그 와중에 감독 한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처벌이 두려운 조선인 노무자들은 제각기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폭행을 당해 몸이 성치 못한 노무자 두 명이 아버지의 발을 잡고 매달렸다. "우리도 데려가 주시오!" 차마 뿌리치지 못한 아버지는 이들을 부축하며 함께 달아나다가 쫓아온 일본인과 격투를 벌였다. 추격을 간신히 피하긴 했으나 이 과정에서 이마에 그만 흉터가 생기게 됐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 이마의 흉터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다가 생긴 값진 표지와 다를 바 없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아버지는 고향인 경남 양산에서 조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계셨다. 그분들은 소작농이었다. 전쟁이 길어지자 일본인 관리는 "감자를 심지 말고 군수품인 면화를 심으라"고 독촉했으나 가족의 생계가 달린 일이었기에 감자 농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밉보인 아버지는 졸지에 주재소로 연행됐고, 이것이 그만 징용으로 이어지게 됐다.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끌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어느 산속이었다. 도로를 내고 석재를 캐는 공사 현장이었다. 이미 수백 명이나 되는 조선인 노무자들이 '보국대(報國隊)'라는 미명하에 끌려와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다. 작업 여건의 열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움막 같은 숙소에서 잠을 자야 했고, 길에 버려진 감자 껍질을 주워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무엇보다도 노무자들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일본인 감독들이 다반사로 행하는 구타였다.
초가을 어느 날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데도 작업 지시가 떨어졌다. 모두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격분, 집단 항의에 나섰다. 이것을 난동으로 여긴 일본인 감독들은 각이 진 몽둥이를 무자비하게 내리치며 해산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인 노무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폭력사태로 번졌고, 그 와중에 감독 한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처벌이 두려운 조선인 노무자들은 제각기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폭행을 당해 몸이 성치 못한 노무자 두 명이 아버지의 발을 잡고 매달렸다. "우리도 데려가 주시오!" 차마 뿌리치지 못한 아버지는 이들을 부축하며 함께 달아나다가 쫓아온 일본인과 격투를 벌였다. 추격을 간신히 피하긴 했으나 이 과정에서 이마에 그만 흉터가 생기게 됐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 이마의 흉터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다가 생긴 값진 표지와 다를 바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아버지는 두 노무자를 차마 떨쳐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보살폈다. 나중에 그들과 더불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이후의 삶도 곤고(困苦)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동해시로 불리는 강원도 묵호에 정착한 뒤로 오징어잡이 배를 탔는가 하면, 어선 건조에 쓰이는 목재를 위한 나무꾼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태백의 탄광을 전전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든지 돈을 벌어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단한 일상에서도 아버지는 여름이면 우리 두 형제를 바닷가에 데리고 가서 물놀이를 함께하며 즐겁게 놀아주셨고, 자식들의 생일이나 소풍·운동회 땐 어김없이 흰 쌀밥을 지어 우리를 호강시켜 주셨다. 정작 아버지 자신은 찬합에 담은 밀기울 수제비로 노동의 허기를 달래셨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노년에 폐암에 걸려 시골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쇠잔한 모습이 안쓰러운 데다 여태껏 아버지로부터 혼쭐이 나거나 꾸중을 들은 적이 없다는 생각에서 말을 붙였다. "아버진 평생 사시면서 노여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지요.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는 담담히 말씀하셨다. "난들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는 일이 왜 없었겠어. 하지만 굳이 잘못을 따지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내 심성 역시 악해지니 차라리 속으로 삭이는 편이 나았지. 그리고 세상을 살다 보면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는 일보다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일이 더 많은데, 나쁜 것은 내뱉고 좋은 것만 취하면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잖으냐." 그 말 속에서 아버지를 가난하고 능력이 모자란다고 여기고 숱하게 원망하는 자식을 사랑과 헌신으로 보듬었던 그 넓고 깊은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의 발톱을 깎아 드린 적이 있다. 발톱이 두꺼웠고 형태도 뭉그러져 "발톱이 왜 이리 못생겼어요?" 하고 투정했더니 아버지는 겸연쩍었던지 슬그머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셨다. 그러자 내가 되레 객쩍어서 아버지의 발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칠십여년의 세월 동안 제 몫을 다한 꺼칠하고 묵묵한 발이었다. 그것도 이미 십수 년 전의 일이다. 지금 내가 예순을 넘어서야 나이가 들면 발톱뿐 아니라 발 역시 보기 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아버지를 여의는 날까지 이 못난 자식은 효도는커녕 투정만 부렸다는 것이 죄스럽게 여겨졌다. 아버지처럼 사람의 도리,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못내 자책하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노년에 폐암에 걸려 시골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쇠잔한 모습이 안쓰러운 데다 여태껏 아버지로부터 혼쭐이 나거나 꾸중을 들은 적이 없다는 생각에서 말을 붙였다. "아버진 평생 사시면서 노여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지요.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는 담담히 말씀하셨다. "난들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는 일이 왜 없었겠어. 하지만 굳이 잘못을 따지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내 심성 역시 악해지니 차라리 속으로 삭이는 편이 나았지. 그리고 세상을 살다 보면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는 일보다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일이 더 많은데, 나쁜 것은 내뱉고 좋은 것만 취하면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잖으냐." 그 말 속에서 아버지를 가난하고 능력이 모자란다고 여기고 숱하게 원망하는 자식을 사랑과 헌신으로 보듬었던 그 넓고 깊은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의 발톱을 깎아 드린 적이 있다. 발톱이 두꺼웠고 형태도 뭉그러져 "발톱이 왜 이리 못생겼어요?" 하고 투정했더니 아버지는 겸연쩍었던지 슬그머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셨다. 그러자 내가 되레 객쩍어서 아버지의 발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칠십여년의 세월 동안 제 몫을 다한 꺼칠하고 묵묵한 발이었다. 그것도 이미 십수 년 전의 일이다. 지금 내가 예순을 넘어서야 나이가 들면 발톱뿐 아니라 발 역시 보기 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아버지를 여의는 날까지 이 못난 자식은 효도는커녕 투정만 부렸다는 것이 죄스럽게 여겨졌다. 아버지처럼 사람의 도리,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못내 자책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