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해례본) 국가에 바쳤다… 절도범은 입 열라"

지난달 12일 경북 상주 낙동면의 농가주택에 20명이 넘는 단속반원이 들이닥쳤다. 국보급 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선정된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은닉, 훼손한 혐의로 지난 2월 1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은 배모(49)씨의 집을 압수수색하기 위해서였다. 28년간 도난문화재를 추적해온 강신태(59·사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은 이틀 꼬박 단속반과 함께 마루와 안방, 마당을 샅샅이 뒤졌으나 소득은 없었다.

"의심 가는 곳이 있긴 하지만, 집을 허물 수도 없고…."

허탕치고 돌아선 강 반장에게 지난주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훈민정음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도난당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소유주인 조용훈(67)씨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해례본을 당장 찾을 수 없지만, 오는 10일 있을 항소심 심리를 앞두고, 피고인 배씨를 압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확보한 셈이다. "원소유자도 국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데, 그걸 훔친 사람이 버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강 반장은 "3년10개월 동안 해례본을 되찾기 위해 매달렸는데, 70~80%쯤 되찾은 것같다"고 했다.

강 반장이 배씨의 집을 찾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작년 8월 30일 배씨를 문화재 은닉·훼손혐의로 자택에서 체포할 때도 현장에 있었다. "해례본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14명이 쳐들어갔어요. 40분간 배씨를 설득했는데, 처음엔 내놓을 듯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리더군요." 1심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문화재청은 전문가들과 함께 해례본의 가치가 '1조원 이상'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은닉·훼손 문화재의 가치가 높을수록 형량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배씨가 해례본을 내놓도록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배씨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2008년 7월 경북 상주에서 공개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보 70호로 지정된 간송미술관 소장 해례본과 동일한 판본인 데다, 간송본(本)에는 없는 당시 연구자의 표기·소리 주석이 붙어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씨가 해례본을 골동품상 조용훈씨 가게에서 훔친 사실이 드러나면서 배씨는 해례본의 소재를 감췄다.

강신태 반장은 문화재 절도범과 도굴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최고 고수다. 2001년 문화재 절도 1인자로 꼽히던 서모씨를 구속하고, 도난당한 문화재를 되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사건을 수사하면서 해례본 소유주 조용훈씨와 친분을 쌓게 됐고, 이번에 조씨를 설득하는 데도 앞장섰다. 조용훈씨는 7일 오후 1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소유권을 국가(문화재청)에 넘기는 기증서 전달식을 갖는다.

강신태 반장은 다음달 정년을 앞두고 있다. 해례본 회수를 도난문화재 추적인생의 마무리로 삼으려는 각오다. 3년10개월간 모습을 감췄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는 10일 열릴 항소심 2차 심리에서 판가름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