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작가 '따로 또 같이(서울의 연인, 런던의 부부 소재로 공동기획)' 낸 소설… 사랑은 없다

"절대 열어 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 같은, 무섭고 서늘한 결혼의 진실이더군요."(정이현)

"낭만적 연애소설의 허구를 폭로한, '로맨스 없는 로맨스 소설'이었습니다."(알랭 드 보통)

저자이자 상대의 책을 가장 먼저 읽은 '첫 독자'의 일성이다. 스위스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Botton·46)과 한국의 젊은 세대에 가장 호소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인 정이현(40)의 공동 기획 소설 '사랑의 기초'(톨 펴냄·2권)가 출간됐다. 유럽과 한국의 매력적인 두 작가가, 그것도 사랑과 결혼이라는 주제로 의기투합했다는 점 때문에 기획단계부터 화제가 됐던 작품. 처음에는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남녀 버전으로 쓰자는 제안(알랭 드 보통)도 있었지만, '혼자만의 작업'이라는 문학의 특수성이 결국은 이 두 작가를 각각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의 경장편 소설을 쓰는 것으로 이끌었다.

상업적 기획이라는 일부 비판도 있었지만, 두 작가의 문학적 관심과 공통점은 이 프로젝트에 '최적화된 조합'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각각 런던과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살면서, '낭만적 사랑의 허구'에 대한 경쾌한 도발과 사유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지속해 왔다. 정이현의 등단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와 대표작인 '달콤한 나의 도시', 또 보통의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등이 그 예다. 달콤한 해피엔딩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유감이지만 다른 책을 선택할 것.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 무대에서, 관객이 모두 돌아가고 조명의 불이 모두 꺼진 뒤 펼쳐지는 블랙코미디 같은 작품들이다.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역할분담은 공교롭다. '연인들'이라는 제목의 정이현 소설은 결혼을 꿈꾸는 미혼 남녀의 사랑. 반면 보통이 쓴 '한 남자'는 마침내 결혼에 이른 두 남녀가 그 이후에 펼쳐가는 삶이다. 두 작가의 특장(特長)은 이번 작품에서도 예외 없다. 섬세한 작가 정이현의 '연인들'이 연애의 디테일에 바탕을 둔 경쾌하고 가슴 저릿한 '소설'이라면, '일상의 철학자'라 불리는 보통의 '한 남자'는 사회학과 심리학에 바탕을 둔 '이론서'에 가깝다.

두 소설을 요약하면 한 편은 서울의 연인인 준호와 민아의 사랑과 좌절이고, 또 한 편은 런던의 기혼부부 벤과 엘로이즈의 기대와 실망이다. 하지만 두 편을 나란히 읽다 보면 '연인들'은 대한민국 20대의 연애를 가감 없이 찍어낸 다큐멘터리고, '한 남자'는 그에 대한 해설서가 아닐까 하는 연상으로 이어진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에서 '낭만적 사랑'의 현재 그 효용에 관한 진술들이 그렇다.

준호에게 연애는 "비현실적인 어떤 것, 구차한 현실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연인들' 159쪽)이다. 웹 디자인 PD라는 세련된 이름의 직업을 지녔지만, 그 직함은 사실 클라이언트들의 일관된 '을(乙)'이라는 의미의 다른 이름이며, 얼마 안 되는 월급의 1/3을 생활비로 어머니에게 바쳐야 하는 팍팍한 삶이다. 연애는 그 현실에 대한 탈출구다. 보통은 '한 남자'에서 그 이유를 사회경제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고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생산하는가를 기준으로 존재를 가차 없이 심판하는 시스템 속에서, 더구나 이처럼 종교를 저버린 시대에 우리의 정신이 버텨낼 수 있으려면, 비물질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춘 다른 평가방식이 절실해진다."('한 남자' 65쪽)

두 작가는 초고(草稿)를 완성한 뒤 지난해 9월 서울에서 만났고, 이후 수십여통의 이메일로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정이현은 보통의 작품에 대해 "'낭만적 사랑'에 덧씌워진 현대사회의 신화를 깨는 것뿐만 아니라, 느낌으로 충만해야 할 사랑이라는 단어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고 했다. 보통은 "처절한 비극과 해피엔딩, 어느 한 쪽의 상투적 결말을 선택하기엔 정이현은 매우 영리하고 흥미진진한 작가. 인간의 마음 아래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정이현의 목소리는 대담하고 독창적이다"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