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명재고택·돈암서원·관촉사 미륵보살… 논산 강경서 역사를 머금다

이튿날 명재고택(明齋故宅)에서는 윤증선생의 13세손 윤완식(56)씨가 탐방단을 맞아 일조량과 풍향, 낙수의 자연 에너지를 과학적으로 활용한 가옥의 구조를 안내했다. 300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안채에서 뒤뜰로 이어진 나무 덧문은 뒤틀림이 없을 정도로 견고했고, 당대 지성의 집합소였던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바라본 연못 풍경은 탄성을 자아냈다.

17세기 말 노론(老論)계를 대표하는 돈암서원(遯巖書院)과 소론(少論)의 거두였던 명재고택은 버스로 15분 거리였다. 이 지근거리에서 두 세력은 서로 대립하고 길항하며 많은 인재를 양성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꽃을 피웠다. 퇴역장교인 최봉성(59)씨는 "서원과 고택이란 가장 단맛이 없고 복잡한 곳이어서 피하기 마련인데, 설명을 들으니 조선 선비들의 정의, 명예 그리고 고결한 정신이 함축된 공간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도서관·교보문고·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하고 대산문화재단이 후원하는 '길위의 인문학' 탐방단 80여명이 4~5일 '문학의 길, 역사의 길'을 주제로 논산 강경을 답사했다. 백제문화권을 돌아보기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으로 4월에 두 번 실시된 한강-금강-서해로 이어지는 '고대 한류 루트'에 해당한다.

강경읍사무소에서 열린 강연에서 소설가 박범신은 이 지역과 금강이 자신의 문학을 탄생시킨 모태이자 젖줄임을 고백했다. 청소년기 주린 배를 움켜쥐고 네 시간씩 걸어서 통학하던 그는 벼 이삭이 맺힌 황금 들판을 볼 때마다 묘한 불균형을 경험했다. "저 밖의 풍요와 내 안의 결핍, 눈에 비친 찬란한 세계와 실제 손을 담근 참담한 현실의 가파른 격차가 평생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밝혔다.

천 년 최대 거불(巨佛)로 꼽히는 관촉사 석조 대미륵보살 입상 아래에서는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은진 미륵'으로 알려진 18.12m의 석불은 오늘날의 캐리커처를 연상시키듯 얼굴과 손이 과장되게 부각된 낯선 형태였다. 탐방단은 그 연유를 듣기 전, 저런 형태를 만들어낸 당시 장인들의 의식을 읽어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저녁식사 후 백제문화관광호텔 연회실에서 열린 '북 콘서트'에서는 가수 김현성의 노래, 전문가의 강연, 참가자의 낭송이 어우러져 감성과 지성을 자극했다. 이해준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1박 2일 동안 흥미진진한 달변으로 박문약례(博文約禮)의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때 '민방위 스타 강사'로 불렸던 그는 뛰어난 입담과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연상시키는 질문공세로 시종일관 청중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