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36] '라듸오 뜨라마'의 황금시대

1927년 봄. 정규방송 개시 3개월째를 맞은 경성방송의 청취자들이 못 보던 형식의 프로그램을 만났다. 방송 드라마였다. 5월 23일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 별세 21주기를 맞아 추모 특집을 방송하면서 그의 작품 '인형의 집'과 '유령'을 '라듸오 뜨라마'로 방송한 것이다. 무성영화나 연극만 알던 대중들이 전파 미디어를 통해서도 아기자기한 스토리를 감상하게 됐다.(조선일보 1927년 5월 23일자)

이보다 앞서 1926년에도 '새벽 종소리'라는 드라마가 라디오 전파를 탄 적이 있지만 여배우 복혜숙(卜惠淑)이 이야기를 그냥 죽 읽어나가는 식이었다. 훗날 영화·연극을 주름잡는 배우가 된 복혜숙은 첫 드라마 방송 때 "마이크가 사람의 혼을 빨아들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무서워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대사를 읽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34년 톨스토이 소설 '부활'을 원작으로 라디오 드라마를 생방송하던 여자 배우는 카츄사와 네플류도프 공작이 시베리아 벌판에서 이별하는 대목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진짜로 우느라 대사를 전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방송사고'였지만 당시의 청취자들은 잘못으로 여기기보다는 여자 배우의 울음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별건곤' 1934년 5월호)

초기엔 라디오 방송극에 전문적으로 출연하는 '성우(聲優)'라는 직업이 없었고 영화인·연극인들이 출연했다. 연극인 김영팔(金永八)을 비롯, 영화인 이경손(李慶孫), 경성방송 PD이자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崔承一) 등이 1927년 일찌감치 '라디오 드라마 연구회'를 만들어 '라디오 연예 푸로그람에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운동을 벌였다.(조선일보 1927년 7월 3일자) 극예술연구회가 1935년 3회에 걸쳐 연속 방송한 안톤 체호프 원작의 라디오 드라마 '앵화원(櫻花園)'에는 '젊은 여시인' 모윤숙과 노천명도 출연했다.

라디오 드라마들은 거칠고 엉성했지만 고단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동포들을 위로했다. 주 소비층은 역시 여성들이었다. 최초의 본격 라디오 드라마가 여성해방을 다룬 '인형의 집'이었다는 사실은 방송극이 여성용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경성방송이 개국하던 1927년에 1440명에 불과하던 청취자가 10년 만에 10만을 돌파하는(조선일보 1937년 10월 24일자) 급성장을 하는 데도 라디오 드라마가 큰 역할을 했다. 방송극의 황금기로 꼽히는 1936년의 세상 분위기를 전하는 잡지 기사는 "한 번 라듸오를 논 사람은 여기에, 말하자면 인이 박히여 하로도 못 드르면 궁금할 만치 된 모양"이라고 했다. ('조광'193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