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다른 나]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인 여성, 10년간 밤만 되면…

"9시부터 6시까지 사무실 근무 뒤 네 시간 반씩 연습한 지 10년…
'못하니까 잘할 때까지 해봐야지'서른 두 살에 무용단 오디션 합격
불가능했던 동작 성공할 때마다 생겨난 자신감, 직장생활 도와줘"

가수 코나의 노래에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것이 있습니다. 곡의 내용과 별개로 제목만 놓고 보자면 제 삶과 비슷합니다. 저의 낮 시간은 평범한 직장인과 다를 바 없지만, 밤 시간은 누구보다도 활기차니까요.

밤의 저는 댄서(dancer)입니다. 하루 평균 연습시간이 오후 7시부터 밤 11시 반까지 4시간30분이고, 일주일에 6일을 연습장에서 보냅니다. 종목은 재즈댄스로 10여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2005년부터는 '아이 댄스 컴퍼니'라는 재즈댄스 무용단에 입단, 정식 단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월급은 받지 않지만, 해마다 한 번 이상 공연을 위해 무대에 섭니다. 관객들이 입장료를 내고 공연을 보러 오니 그야말로 '춤꾼'인 셈이죠.

낮의 저는 회사원입니다. 서울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는 회사에 9시까지 출근해 오후 6시까지 근무합니다. 2001년부터 몸담고 있는 한국알파라발은 스웨덴에 본사가 있는 산업용 기계 회사입니다. 열교환기, 원심분리기, 펌프, 밸브 등을 취급하지요. 회사에서 제 직책은 산업기계부 과장으로 '세일즈 서포트'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영업사원이 주문을 받아오면 판매가 마무리될 때까지 지원해주는 일이지요.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했고, 다른 회사에 1년 다니다가 지금 직장으로 옮겼습니다. 전공도, 직장도 '춤'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퇴근과 동시에 댄서로 변신합니다. 회사를 나와 역삼동 댄스 스튜디오에 오면 춤에만 몰두하지요. 연습을 마치고 나서 귀가하면 밤 열두시에서 한 시쯤 됩니다. 워낙 오랫동안 그렇게 살다 보니 생활도 단순합니다. '집~회사~댄스 스튜디오'만 시계추처럼 오갑니다. 두 개의 삶 사이에서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려다 보니 친구를 만난다거나 하는 사생활은 포기한 지 오래됐습니다.

재즈댄스를 시작한 건 2001년 무렵이었어요. 2000년 일본 영화 '쉘 위 댄스'가 국내 개봉한 이후 갑자기 댄스 열풍이 불었지요. 주변에 춤추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걸 보니 저도 춤을 추고 싶어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맞춰 춤추는 걸 좋아했지만, 막상 춤을 배울 기회는 없었습니다. 무작정 재즈댄스 학원에 등록했는데, 처음엔 스텝 하나 손동작 하나가 만만치 않더군요. 대학 때까지 책상 앞에 파묻혀 있었던 몸이 격렬한 춤 동작을 따라 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뒤처질 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못하니까 잘할 때까지 해 보자'는 오기로 버텨가며 계속 춤을 췄습니다.

그렇게 3~4년 지나고 나니 다음엔 '동작을 좀 더 정확하고 예쁘게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어릴 때부터 춤을 춰 온 친구들과 비교하면 저 자신이 너무 슬퍼지니까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아지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동작에 임했어요. 어설펐던 동작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걸 보며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결국 재즈댄스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무용단 오디션을 보고, 단원이 되었습니다.

정식 단원이 되고 매년 공연을 하게 되다 보니 마음가짐이 달라지더군요. 처음엔 무아지경(無我之境)으로 춤을 췄지만, 요즘은 춤을 출 때마다 '안 틀리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동작 하나, 표정 하나, 박자 하나가 정확해야 공연 때 움직임의 질(質)이 높아지기 때문이지요. 즐기면서 해도 될 것을 왜 그렇게 욕심을 내서 고생하느냐고요? '내가 나를 이겨낸다'는 사실이 기분 좋기 때문입니다. 단장님의 꾸중을 들어가며 못하던 동작을 마침내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주니까요.

제게 춤은 사회인이 돼 시작한 일이라 하나의 도전이었어요. 학교나 직장에서는 어느 정도 완성된 인력으로 대접받았지만, 춤을 추러 가면 갓난아기와 다름없는 상태였죠. '아, 내가 여기서는 아직 바닥이구나' 하는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도 다른 곳에서는 초보'라는 생각이 직장에서 아랫사람을 대할 때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 사고를 유연하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춤을 추지 않고 회사만 다녔다면 때론 직장생활에 회의를 품었겠지요. 그러나 '회사원 아닌 또 다른 나'가 있다는 자각이 역으로 직장생활에 충실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다들 멋있다고 하는데, 부모님은 아직도 걱정이 크십니다. 시집가라는 이야긴 이제 하지 않으시지만, 공연 때마다 핼쑥해지는 저를 보고 "나이도 있는데 왜 그 힘든 걸 하느냐. 이제 그만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세요.

멋 모르고 시작한 춤이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연륜이 쌓였습니다. 이제 공연에서 주역까진 아니더라도 중간쯤의 배역은 맡게 되었습니다. 나중엔 공연 수익금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거나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재능 기부를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부터 춤을 통해 남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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