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파 초월… 치유의 길' 전북에 열렸다

1791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천주교 순교의 첫 피를 뿜었다. 윤지충은 어머니 권씨가 권상연의 고모였고, 다산 정약용의 어머니 윤씨가 고모였다. 정조는 사형집행을 미루려 했으나 이미 집행된 뒤였다. 스물네 살 김대건은 1844년 말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금강변 익산 나바위에 첫발을 디뎠다.

벽안(碧眼)의 처녀 마티 잉골드는 1897년 전주 은송리(중화산동)로 들어와 말을 타며 헐벗고 굶주린 이땅 사람들의 질병을 돌봤다.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대 출신인 그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서 이듬해 이 땅에 서울 광혜원에 이어 두번째로 전주에 근대식 병원인 예수병원을 세웠다.

보수 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불교가 남긴 한국 최고(最古)의 탑이다. 미륵사는 삼국유사가 남긴 선화공주 설화의 주인공 무왕이 지은 당대 동북아 최대의 절이었다. 2009년 1월 발굴된 사리장엄과 사리봉안기는 설화를 역사로 바꾸면서 절정의 백제 공예기술을 찬란히 드러냈다.

'민족종교'인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1916년 익산에 총부를 열며 대중 교화를 본격화했다. 총부는 소태산을 기리는 탑과 기념관을 세우면서 그가 1924년 세운 본원실 등을 문화재로 등록해 '원불교 성지'로 개방하고 있다. 원불교 총부와 영광성지엔 마음 치유센터가 들어선다.

한국의 '4대 종교'가 전북과 맺은 깊은 인연이 '아름다운 순례길'을 만들어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완주~익산을 거쳐 다시 완주를 지나 김제를돌고 전주로 돌아오는 길로 그 길이가 약 1000리(400㎞)에 이른다. 사단법인 한국순례문화연구원은 2009년 가을 이 길을 20~36㎞씩으로 나눠 8박9일의 순례코스로 만들면서 벌써 6만여명을 걷게 했다.

전북도와 순례문화연구원이 올 가을 이 길에서 '세계순례대회'를 개최한다. 4대 종교 신자뿐 아니라 시민, 외국인까지 모두 5만명을 참여시키려는 행사다. 지난 4월 순례길 '기본조사'를 마치고 7일 이 대회 조직위원회를 출범했다.

전북도청에서의 조직위 발대식엔 김완주 전북지사가 나와 "종단을 초월, 인류의 화합을 이루며 마음을 치유케 하는 길로, 정부와 함께 순례길 정비와 대회 개최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순례대회는 일정을 11월 1~11일로 잡았다. 전주 풍남문을 출발, 한옥마을과 치명자산, 완주 송광사와 천호성지, 익산 나바위와 미륵사지, 완주 초남이, 김제 금산사와 수류성당, 그리고 모악산을 돌아 전주 예수병원, 서문교회로 돌아오는 길이다.

"프랑스 남부에서 스페인 북부로 이어지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지만, 아시아에서 이토록 깊은 믿음과 헌신의 메시지를 간직한 길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전북 4대 종단 대표들이 함께 웃으며 조직위를 발족하면서 조직위원장인 김수곤 전 전북대총장은 "대회가 아니어도 언제든 고행의 이 길을 걸으며 마음의 아픔을 치유하시라"고 권유한다.

대회 개최를 위해 전북도와 순례문화연구원은 이달부터 순례길 정비에 나선다. 방향 표지판만 939개, 안내판만 70개를 세운다. 순례길 곳곳의 처치(church)-템플(temple)은 스테이(stay) 공간이 되고 동네마다 마을회관이나 민박도 마련한다. 전북도는 2일 순례길 중간중간에 간이화장실과 벤치 등을세우기 위한 비용까지 모두 14억원을 1차 추경 예산에 편성했다.

도와 순례문화연구원은 이 대회를 올해로 멈추지 않으려 한다. 교황청이 기획한 2014년 아시아순례대회를 유치하는 등 세계적인 순례길로 자리잡게 하려 한다. 이 길 곳곳에 자리잡은 종교 유산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키 위해 도와 종교계-학계는 머리를 맞대고 있다. 작년 가을 파딜랴 주한 교황청 대사는 완주 천호성지에서 기독교·불교·원불교·천주교 지도자들을 만났다.

조직위는 순례대회 중심무대를 8박9일 순례길에 두면서 현대 문명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대상으로 화합과 치유의 행사도 다양하게 마련한다. 그 실행계획이 9월쯤 완성된다. 김 조직위원장은 "모든 종단과 종파의 벽을 허물면서 시민 각계의 협력을 끌어내 평화의 미래를 기약하는 축제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