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팝 컬처] 언제 어디서나 하염없이 TV만 보는 대한민국

"앳되고 화장기 없던 올림픽 꿈나무

DMB 보면서 질주한 차량에 참변

왜 25톤 트럭 몰면서까지 TV 보나

수술실이나 법정에서도 볼 건가

외식 나온 가족도, 지하철에서도

모두들 보고 또 보는 기괴한 풍경"


상주시청 사이클 선수들이 훈련 도중 참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멍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 말 4대강 자전거길 914㎞를 종주할 때 함께 자전거를 탔던 바로 그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토해양부와 대한사이클연맹은 4대강 자전거길 완공을 앞두고 공동 점검차 대장정(大長程)에 나섰다. 7일간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구간을 구자열 대한사이클연맹 회장이 선두에 서고 연맹 회원들과 자전거 동호인 10여명이 뒤를 이어 페달을 밟았다. 그 이륜(二輪) 행렬의 끝에서 나도 서툰 페달링으로 문경새재를 넘고, 낙동강변을 달려 전국 자전거길을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일주일간 이어진 이 자전거 행렬에 매일 다른 팀의 사이클 선수들이 동행했다. 국가대표 선수들부터 체육고 선수들까지 각 지역 선수들이 종주단 후미를 맡아 처지는 사람들을 밀어주곤 했다. 종주단 멤버 가운데 자전거 경력이 가장 짧은 내가 주로 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특히 오르막이 6㎞나 이어지는 해발 548m의 이화령을 자전거로 오를 때 선수들이 등을 밀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선수들 가운데 상주시청 여자 선수들이 있었다. 종주 5일차였던 작년 12월 5일 경북 구미에서 안동까지의 자전거길 138㎞ 구간을 이동할 때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여자 선수 6명이 안동대 남자 사이클팀 선수 10명과 함께 종주단을 에스코트했다. 당시 상주시청 선수 6명은 김은희·이민정·곽미희·손은주·김선영·정수정 선수로 이 가운데 이민정·정수정 선수가 이번에 꽃다운 목숨을 잃었고 김선영 선수가 크게 다쳤다. 역시 이번에 참변을 당한 박은미 선수는 당시 국가대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전제효 상주시청 감독도 함께 나와 선수들을 독려했었다. 종주단의 평균 속도가 시속 30㎞ 미만이었으므로 평지에서 최고 시속 60㎞까지 낼 수 있는 사이클 선수들은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 매우 지루하고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상주시청 선수들은 단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그때 상주시청 선수들과 대화를 많이 하지는 못했다. 안동대 남자 선수들은 자기들끼리 장난도 치고 얘기도 많이 했는데, 상주시청 여자 선수들은 무척 과묵했다. 내가 하도 자주 처지니까 나를 밀어주던 한 선수가 "아이고, 아저씨요" 하고 사투리로 말했던 게 기억난다.

그날 138㎞를 달려 안동에 도착할 때쯤 한 상주시청 여자 선수와 잠깐 대화를 나눴다. 그 선수는 중학교 때부터 사이클을 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뭘 잘할 수 있고 뭘 하고 싶은지 몰랐는데, 사이클을 타고나서는 확실히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미 꽤 큰 규모의 대회에서 금메달도 땄다며 런던올림픽에 나가 꼭 메달을 따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 선수의 이름을 물어봤지만 적어놓지 않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 사고 뒤 보도된 선수들의 사연을 읽어보니 그 선수가 열아홉 살 정수정 선수인 것 같다. 그 앳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올림픽의 꿈을 말하던 선수가 그만 아깝고도 허무하게 스러졌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시속 70㎞로 달리며 DMB로 TV를 보다가 2차로를 달리던 선수들을 무쇠 괴물로 덮쳐버렸다고 경찰이 밝혔다. 대관절 TV가 무엇이기에 25t짜리 트럭을 몰면서까지 본단 말인가. 운전을 하면서 TV를 보는 게 아무렇지 않다면 의사가 수술을 하면서 드라마를 보고 법관이 재판 도중에 오락 프로그램을 봐도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다. TV를 보며 운전하는 행위는 언제든 전방 주시에 태만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므로 무조건 대형 사고 미수범(未遂犯)으로 다스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처럼 천지에 TV가 널려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모든 집의 가장 좋은 자리는 당연히 TV가 차지한다. 집에 사람이 있는 한 TV는 냉장고처럼 계속 돌아간다. "TV와 거실 등 스위치가 연동돼 있다"고 할 정도다. 외식 나온 가족들이 일제히 식당 TV를 보면서 밥 먹는 장면은 너무 흔해서 얘깃거리도 안 된다. 지하철 밖에도 TV, 지하철 안에도 TV가 있는데 앉거나 선 사람들도 하나같이 손바닥에 TV 한 대씩 올려놓고 마냥 흐뭇해한다. 기괴한 풍경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운전 중 TV를 보는 행위에 대해 최대 7만원까지 범칙금을 물리겠다고 한다. 내게는 이것이 "운전 중 졸거나 뜨개질을 하는 행위에 벌금을 물리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벌금이 아니라 면허를 취소해야 할 중죄(重罪)다.

지난 5일 치러진 박은미·이민정·정수정 선수의 합동 영결식에서 유족들은 "하늘나라 가서는 자전거 타지 마라"고 울부짖었다. 유족들은 하릴없이 자전거를 원망하겠지만 나는 TV를 원망하고 싶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사이클 선수들아, TV 없는 하늘나라에서 마음껏 자전거를 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