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이 끝나고… 깜깜한 무대 위 학교폭력 피해·가해자가 함께 섰다

경북 영천시 한 고등학교 강당. 교실처럼 꾸며진 무대에서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어두운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있다. 그는 '살고 싶지 않다, 학교가 싫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등의 낙서를 끄적이고 있다.

곧 조명이 꺼지고, 그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등교하는 것이 무서워. 매일 돈을 뺏기고. 나를 우습게 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노래가 끝나고 다시 조명이 켜졌다. 여학생 주위를 남녀학생 6명이 에워쌌다. 껌을 씹던 그들은 "학교 오지 말랬지. 니 얼굴 보는 게 역겨워"라며 괴롭혔다. 강제로 일으켜 세운 뒤 뺨과 머리를 때리거나 머리채를 잡아당겼고, "오늘 20만원 상납하면 용서해 준다"고 했다. 또 "야! 점심시간까지 빵 100개하고, 음료수 100개 사와"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피해 여학생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지만 반 친구들은 이를 외면했다.

지난 3월 말 '왕따' '셔틀(심부름)' '폭행'을 소재로 55분간 진행된 뮤지컬 공연 내용의 대부분은 실제로 이 학교에서 벌어진 학교폭력 사례에서 따온 것이다. 작년 말 이곳에선 집단따돌림과 폭행, 금품 갈취 등으로 우울증을 앓던 한 여학생이 수면제를 먹는 극단적 행동을 보여 문제가 됐다. 공연 당일 1·2학년 학생 400여명이 뮤지컬을 관람했다. 이날 공연된 뮤지컬은 방송·문화·예술 특성화 대학인 대경대(경북 경산시 자인면) 뮤지컬과 교수와 학생 20여명이 직접 제작했다. 이들은 지난 3월부터 영천지역 내 학교폭력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13개 중·고등학교를 돌며 폭력예방 뮤지컬을 공연했고, 앞으로도 프로그램을 계속할 계획이다.

공연이 끝나자 실제 학교폭력 피해학생과 가해학생 등 2명이 무대 위에서 서로의 입장을 바꿔보는 상황극을 5분간 진행했다. 피해학생은 일진역할을 한 배우들과 함께 가해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거나 돈을 요구하면서 학교폭력을 재연했다. 상황극이 끝난 뒤 배우가 실제 가해학생에게 기분을 물었다. 가해학생은 "친구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괴로운 줄 몰랐다. 앞으로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친구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겠다"고 답했다.

대경대 측은 "작년 연말부터 대구·경북에서 학교폭력으로 인한 학생자살이 잇따르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딱딱한 예방교육 대신 학생들이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학생과 교수가 의기투합해 뮤지컬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학교별로 수집한 실제 학교폭력사례들을 춤과 노래 등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배우들이 펼친 연기는 공연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 때문에 중고교 학생들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며 주위 친구들이 어떤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뮤지컬과 학생들은 앞으로도 일선학교의 요청이 들어오면 해당 학교만의 사례로 공연을 펼쳐나갈 생각이다.

대경대 뮤지컬과 김찬영 교수는 "학생들이 먼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학교 폭력을 줄일 수 있다"며 "학생들이 직접 겪는 실제 이야기들을 다뤘기 때문에 더 느끼는 게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