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동네 의사 송태호의 진료일기] 손가방 하나 들고 산 넘고 물 넘던… '왕진의 추억'

독감 예방접종이 한창이던 작년 가을, 한 여자 환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 시어머님도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거동이 불편하시니, 혹시 집에 오셔서 접종해 주실 수 있나요?" 환자 때문에 왕진을 간 적은 있어도 접종을 위한 왕진은 처음 부탁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에 그날 진료를 마친 뒤 아이스박스에 주사를 넣어 환자의 집으로 갔고, 무사히 예방접종을 마쳤다.

허름한 단칸방에 환자가 누워 있고 의사가 왕진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 진찰하고 둘러앉은 가족들은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이윽고 진찰이 끝나 마당으로 나온 의사는 가족들에게 침통한 표정으로 "더 이상 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편안하게 드시고 싶은 것이나 드시도록 하십시오"란 말을 남기고 떠난다. 가족들은 소리죽여 울먹인다. 이 때 주인공은 환자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에게 복수를 맹세하며 눈물을 흘린다.

예전에 시대극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장면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만 해도 동네 의사선생님이 왕진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그 왕진 가방 안에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고 집 앞 구석구석까지 차들이 다니게 되면서 점점 왕진이란 개념이 없어졌다.

내가 의사가 된 후 처음 왕진한 환자는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였다. 간이 안 좋으셨던 할머니가 갑자기 숨이 차다고 해서 몇몇 주사약을 준비해 부랴부랴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야전군의관 시절엔 순회진료라는 왕진을 신물나게 했다. 트럭을 개조해 털털거리는 앰뷸런스를 타고 몇 군데 왕진을 돌고 나면 나도 모르게 녹초가 되곤 했다. 처음 부대에 갔을 때는 왕진가방조차 없어 자동차 공구함을 사다가 왕진가방으로 썼다. 개원 후에도 가끔 왕진 의뢰를 받는다. 대개의 경우는 너무 연로하셔서 기력이 없거나 병이 말기에 이르러 통증 조절을 해야 할 때다. 왕진을 거절한 적은 없지만 왕진에는 몇몇 법적 제한이 있다. 일단 왕진은 환자가 장기 요양보험 대상자일 때만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다른 경우엔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는 왕진 후 처방받은 약을 살 때도 마찬가지다. 약도 의료보험가가 아니라 일반가로 사야 한다.

의료보험으로 왕진을 하는 경우 의사가 받게 되는 왕진비는 4만9300원으로 낮은 편이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이 왕진을 기피하는 게 사실이다. 가전제품 A/S 출장비보다는 많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어떤 의사는 순수 봉사 차원으로 호스피스 시설에 왕진을 가서 진료한 내역을 의료보험공단에 청구했다가 1년간 자격정지를 선고받기도 했다. 보건복지부가 '속임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공단에게 급여비용을 부담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판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년간의 소송 끝에 누명을 벗었다. 그러니 의사가 웬만하면 왕진을 피하고 싶을 만도 하다.

몇몇 의료생협이라는 곳에서 저렴한 비용에 회원들에게만 왕진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제는 정부 차원에서 왕진절차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 동네의사인 나야 도움이 된다면 왕진을 거절하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