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대중화의 선봉장 - 담백하고 애끊는 창법으로 60년대 팝송 열풍에 도전 "최고 인기 누리다 요절… 남자 팬들이 더 많았죠" 탄생 70주년, 아이돌 못잖네 - 전국·최초·공식 자처하는 인터넷 팬클럽만 40여개 美·中·日, 남미까지 포진, 묘지 관리하는 팬까지…
생전 배호의 모습.
시골 출신 춘식은 서울의 한 공장에 취직했지만 적응하지 못해 고향에 내려가기로 마음먹는다. 낙향을 앞둔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배호가 출연한다는 카바레에 갔다가 얼떨결에 그곳 웨이터로 취직한다. 동경하던 가수 배호를 만나 새로 꿈을 꾸지만 배호는 병마에 시달리다 요절하고, 흠모하던 여가수 미미는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실의에 빠진 춘식에게 카바레 사장은 배호 모창 가수 일을 제안한다….
15일부터 26일까지 강동아트센터에서 공연될 뮤지컬 '천변카바레'의 스토리다. 2010년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초연 때 전석매진을 기록하고 작년에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이 공연이 올해는 더 큰 무대에 오른다.
올해는 배호 탄생 70주년. 그가 29세 나이에 신장염으로 타계한 지 41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배호 열기는 식지 않는다. 인터넷에 공개된 배호 팬클럽만 40여개에 이른다. 다들 '전국모임' '최초 모임' '공식 팬클럽'을 자처한다.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은 16개 시·도에 지부가 있고 미국에 6개 지부, 중국·일본·호주·칠레에도 팬클럽이 있다. 팬들은 노래비를 세우고 매년 가요제를 열며 심지어 배호와 배호의 여동생 묘까지 관리하고 있다. 요절한 가수는 김현식·유재하·김광석·김정호 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이처럼 많은 팬들이 꾸준히 활동하는 가수는 단연 배호다. 왜 배호인가.
지금 배호는 음반으로밖에 남지 않아 '배호 이후 세대'들은 그 인기의 이유를 짐작하기 쉽지 않다. 뮤지컬 '천변카바레'가 어렴풋이 해답을 준다. '천변카바레'는 재즈 드러머로 음악을 시작한 배호가 '배호와 콤보밴드'란 이름의 밴드로 섰던 무대 '천지카바레'를 패러디한 작품명이다. 이 카바레는 현재도 을지로 5가에서 영업을 하고 있으나 주인은 바뀌었다.
이 작품은 배호의 매력적인 저음과 군더더기 없는 창법, 그리고 패션 아이콘이었던 그의 스타일을 잘 살려낸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배호가 섰던 60년대 극장 무대를 그럴 듯하게 재연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 뮤지컬에서 배호 역을 맡은 배우 최민철은 다음 달 열릴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무려 12개 부문 수상후보에 오른 흥행작 '엘리자벳'에서 루케니 역할을 맡은 인물. 배호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지만, 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저음이 배호의 매력을 빼닮았다.
타계한 지 40년이 넘었으나 배호는 노래비·가요제·모창 가수 등의 형식으로 지금껏 살아있다. 배호의 노래들을 엮은 뮤지컬 ‘천변카바레’가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큰 무대에 다시 오른다. / 뮤직웰 제공
배호의 유족은 작곡가였던 외삼촌 김광빈씨('두메산골' 작곡)가 작년 타계한 뒤, 외숙모만 남아있는 형편이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이미자·남진·문주란·정훈희 같은 가수가 배호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배호가 데뷔하던 때는 미8군 무대에서 팝송을 부르던 가수들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TV에서도 최희준이나 패티김 같은 가수들을 주로 출연시켰다. 배호 이전에 남인수 고복성 같은 트로트 스타들이 있었으나 쏟아지는 외국 노래의 물결 속에서 '낡은 음악' 트로트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때 배호가 새로운 트로트를 들고 나타났다. 가사와 멜로디, 리듬은 트로트인데 창법은 완전히 달랐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트로트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을 때 나타난 사람이 배호였다"며 "그는 트로트의 전통적인 애상성과 장식성을 벗어던지고 아주 모던하고 단순하게, 장식을 제거해버려 미니멀한 창법으로 트로트를 불렀다"고 배호의 인기를 설명했다.
21세이던 1963년 '두메산골'로 데뷔한 배호는 불과 3년 뒤인 66년 신장병을 앓기 시작했다.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돌아가는 삼각지' 같은 히트곡을 냈을 때 그는 이미 환자였다. 사회자 등에 업혀 노래를 부른다거나 무대 위에서 각혈을 하며 노래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 역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배호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늘 함께 공연하러 다녔던 가수 정훈희는 배호의 창법을 "병이 든 상태에서 음반 취입을 하고 자기 생명이 얼마 남은 지 모르는 채로 노래를 하느라 배호 특유의 절절하고도 애끊는 창법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투병을 시작하면서 배호는 무대에 서 있을 때 외에는 늘 누워 있다시피 했다. 같은 매니저 밑에 있었던 정훈희가 그보다 열 살 어렸다. "1년 365일 중 340일은 전국을 함께 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다. 정훈희는 "요즘 남자가수들은 고음을 잘 내고 음성도 예뻐야 인기지만, 예전엔 허스키하고 굵은 음성을 최고로 쳤다"며 "그래서 배호는 특히 남자 팬들이 많았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요절했기 때문에 여태껏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