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등급(정부지원 배제한 자체 신용도) 産銀, 고금리 예금 유치 논란

자영업자 김모(41)씨는 지난해 말 H저축은행에서 만기가 된 예금 4000여만원을 찾아 산업은행에 넣었다. 거래 저축은행 직원은 "예금을 재예치하면 금리 4.6%를 받을 수 있다"고 말렸지만, 김씨는 미덥지 못한 저축은행보다 '국책은행'을 선택했다. 산은이 제시한 금리가 연 4.5%로 저축은행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김씨처럼 생각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산은이 시중 부동(浮動) 자금을 대거 빨아들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출시된 KDB다이렉트 예금은 7개월 만에 1조원이 넘는 돈을 유치했다. 특히 저축은행 4곳이 영업정지된 이번 달엔 열흘 동안 1650억원이 KDB다이렉트로 빨려들어 왔다.

◇자체 실력으론 '투기 등급' 은행

산은의 새 고객이 되는 예금자들은 산은이 국책은행이라는 점에 큰 매력을 느끼지만, 실제 산은이 처해 있는 상황은 예금자들의 이런 믿음과는 거리가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달 산업은행의 신용등급을 우리나라 정부의 신용등급과 같은 A로 유지했지만, 정부 지원 변수를 뺀 산은의 자체 신용도(SACP)는 bbb-에서 bb+로 강등했다. '투자 등급'서 '투기 등급(speculative grade)'으로 내린 것이다. S&P는 신용도 강등 이유로 산은이 추진 중인 민영화 계획에 따른 불확실성 증가를 꼽았다. 민영화 이후 정부 지원이 약해지면 경영 부실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산은은 연말까지 기업 공개(IPO)를 완료하고 정부 지분의 최대 30%를 시장에 내놓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S&P는 "민영화로 정부 지원이 감소할 수 있어 산은의 장기 신용등급 전망도 '부정적(negative)'"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산은 고위 관계자는 "기업 공개 후에도 정부가 지분 70% 이상을 들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민영화는 아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산은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S&P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국제 신용평가 회사인 무디스도 산은에 국가신용등급과 같은 신용등급인 A1을 부여하고 있지만, 정부 지원 가능성을 뺀 산은의 독자 신용등급은 Ba2로 평가하고 있다. 이 또한 '투기 등급'이다.

◇나중에 '짐' 될 고금리 예금

산은이 고금리 예금을 앞세워 진공청소기처럼 부동 자금을 빨아들이자, 다른 은행의 불만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산은이 연 4.5% 금리를 주고 어떻게 이익을 내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1년 만기 정기예금의 평균 금리가 4.3%인 저축은행도 그보다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줄 곳이 없다며 아우성인데, KDB다이렉트가 고금리를 앞세워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이다.

산은이 이런 비난을 무릅쓰고 계속 고금리 마케팅을 펼치는 이유는 뭘까. 비밀은 그간 국책은행으로 살아온 산은의 자금 조달 구조에 있다. 산은은 지금까지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발행하거나 자금 시장에서 직접 단기 자금을 빌리는 방법으로 돈을 조달해 왔다. 자금 조달 중 개인예금의 비중은 5% 선에 불과하다.

산은은 민영화 후 다른 시중은행과 경쟁을 하려면 개인 예금·대출 비중을 대폭 늘려야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은행의 자금 조달 비용은 늘어나는데, 마땅한 고수익 자금 운용처를 찾지 못할 경우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소비자는 높은 금리를 따먹으면 그만이지만, 고금리 정책으로 국책은행의 건전성이 훼손되면 자칫 국민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산은이 조달한 돈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계속 살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