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독 오른 그놈의 집안 이해 못해… 그게 연기가 되더라

올해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17일 개봉)에서 김강우가 연기한 '영작'은 '관객의 눈'이 돼줄 것이다. 수천억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관객이 아니고서야 한국을 돈으로 지배하는 재벌 백씨 집안의 탐욕스러운 안주인 '백금옥(윤여정)'이나 돈에 중독되어 살아온 그의 남편 '윤회장(백윤식)' 등에 공감하긴 힘들다. 대신 관객들은 백씨 집안의 은밀한 뒷일을 도맡아 하면서 '돈이 주는 모욕'을 견뎌야 하는 평범한 샐러리맨 영작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11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김강우(34)를 만났다.

―주연치고 대사가 별로 없다.

"비서 역할이라 대답과 인사를 많이 했다. 묵언 수행하는 것 같았다. 감정을 얘기할 수도 없었고 시선만으로 공간과 인물들 간의 관계를 보여줘야 하는 역할이라 힘들었다. 눈빛과 동작을 최대한 세심하게 하려고 했다."

―시나리오를 보면 샐러리맨들이 크게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는 느낌이 들던데.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은 없지만 영화를 찍으며 돈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집사람(탤런트 한혜진 언니)에게 '우리에게 돈이 많으면 좋을까?'라고 물었더니 '난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웃음) 영화에서 영작이 돈더미가 쌓여 있는 백씨 가문의 금고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촬영용으로 만든 '가짜돈'인 줄 알면서도 그 안에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무섭고 압도되는 기분. 좋은 풍경이나 예술 작품을 봤을 때 느끼는 기분 좋은 압도가 아니고 내가 쪼그라드는 느낌인 거다."

―'한국 최고의 재벌가에 들어가게 된 일반인'이란 설정에 공감이 갔나.

"처음에는 보지 못한 세상과 보지 못한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다. 이해 못 하겠더라. 나중에 보니 이해 못 해서 당혹스러워하고, 고민하는 반응을 연기로 보여주는 게 맞았다."

―65세 윤여정씨와의 베드신이 화제다.

"마치 수능시험 보는 것 같았다. 계속 매니저한테 '며칠 남았냐'고 물어봤다. 윤 선배님도 (윤여정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강우야, 어떡하니'라고 하시더라. 그렇다고 내가 선배님한테 '걱정 마세요. 제가 잘 해드릴게요'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데 막상 촬영은 내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배우는 상황이 주어지면 그냥 가는 거다. 필요없는 고민을 한 것 같다."

―임상수 감독과는 첫 작업이다. 감독이 왜 당신을 캐스팅했을까?

"너무 열연을 안 해서 좋다더라."

―칭찬인가?

"감독님이 칭찬이라고 하셨다. (열연) 할 수도 있는데 일부러 안 하고 선을 지켜준다면서. 난 그런 걸 의도한 것도 아니고 사실은 그게 다 열연한 건데.(웃음)"

―데뷔한 지 10년인데 흥행작이 별로 없다.

"'그동안 하나도 조급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2002년부터 연기를 시작했는데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했다. '아직 10년도 안 됐는데 뭐 어때' 하면서 혼자 속으로 불안함을 삭였다. 2년 전 결혼했을 때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고민이 절정에 이르렀다. (동갑인) 집사람에게 '이민 가서 샌드위치 가게 할까'라고 했더니 '너 할 줄 아는 거 연기밖에 없잖아'라고 하더라. 그 말에 내가 바보였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샌드위치 10년 만든 사람들보다 어떻게 더 잘 만들겠나, 연기가 낫지."

―아내 말을 잘 듣나 보다.

"언제나 명쾌하고 현명한 대답을 내놓는다. 좀 무심하긴 하지만. 무심하다는 건 쓰지 말아달라.(웃음)"

―10년 연기 해보니 어떤가.

"지금은 재밌다, 미치게 재밌다. 예전엔 '이 일(연기)이 미치게 좋아서 딴 건 안 해'란 생각을 한 적도 없었고, 현장도 가기 싫었다. 재미없었는데 내 이름 걸고 하는 거니까 쪽팔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다. '돈의 맛'을 찍을 때 배우들과 감독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는 '합일점' 같은 걸 느꼈다. '돈의 맛'을 찍다가 '연기의 맛'을 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