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 다른 나] 주말마다 山 타는 김근숙(43) 평안L&C㈜ 고객지원팀장

지난해 8월 20일 오전 7시 10분, 저는 아프리카 탄자니아 북부의 킬리만자로 정상(頂上)에 서 있었습니다.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해발 5895m)이자 홀로 솟은 산 중에 세계에서 가장 큰 산으로 유명하지요. 덕분에 등반하는 5박 6일 동안 열대우림 지역부터 거대한 관목림, 사막 지형은 물론 정상 부근의 빛나는 만년설·빙하까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엔 낭만적이고 멋진 산행 같지만, 제 기억에 남아있는 건 산소 부족에 따른 호흡 곤란과 고소증(高所症), 추위와 졸음뿐입니다. 그래도 저는 산이 좋아 지난 주말에도 산에 올랐습니다.

저는 '산 사랑'에 흠뻑 빠진 아마추어 산악인입니다. 동시에 의류·패션 업체를 다니는 회사원입니다. 캐주얼 브랜드 '피에이티(PAT)'와 아웃도어 브랜드 '네파(NEPA)', 골프 의류 '엘르(ELLE)골프'로 잘 알려진 평안L&C㈜의 고객지원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고객에게 품질 좋은 제품뿐 아니라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전국 대리점의 고객 관리와 직원 교육을 하는 게 주 업무입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저와 산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됐습니다. 제 고향은 충남 청양입니다.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에 개울이 졸졸 흐르는 아늑하고 포근한 풍경에서 저는 친구들과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온종일 산길을 뛰며 놀았습니다. 가을 녘 아버지와 함께 오르던 마을 앞 오서산의 은빛 억새밭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멋진 풍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산과 맺은 인연은 중학교 때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멀어졌습니다.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 숲 한가운데 놓인 학교, 아스팔트와 매연으로 가득 찬 도심 생활에 적응하다 보니 들판과 산을 마당 삼아 뛰놀던 제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가 산을 다시 만난 건 1989년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직하면서였습니다. 입사 당시 회사는 직원들에게 다양한 동호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 추억 때문이었는지 별다른 고민 없이 산악회를 택했습니다. 산악회 활동도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거의 매주 빠짐없이 산행에 나설 정도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새벽 5시 집에서 나와 도봉산이나 북한산을 7시간씩 오르내리는 것은 일상이 됐습니다. 1995년에는 1박 3일간 지리산을 종주했고, 2006년 5월에는 총거리 42.195㎞의 '불·수·사·도·북 익스트림 산악 마라톤'(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을 잠자지 않고 계속해서 등반하는 것)을 13시간 10분 만에 완주했습니다. 평일에는 기초 체력을 기르기 위해 중랑교 주변 회사에서 집이 있는 창동교까지 중랑천 산책로를 따라 매일 1시간 30분씩 걸어서 출퇴근했습니다. 이렇게 산과 사랑에 빠져 지내다 보니 지금까지 정상에 오른 산만 100곳이 넘습니다.

거친 산을 밤새도록 걷고 가파른 암벽과 씨름하다 보면 육체적 고통으로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등산은 제 마음과 정신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해주는 좋은 의사 선생님입니다. 제가 맡은 업무가 고객 응대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많습니다. 이때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푸른 숲을 걷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 자신과 고객의 입장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직장에서 조금 힘겹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헤쳐나가는 용기와 도전정신도 갖게 되고요. 팀워크를 기르는 데도 등산만큼 좋은 선생님은 없는 것 같습니다. 가파른 산길에서 동료끼리 서로 격려하며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힘을 모아 오르던 기억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게 합니다.

요즘 저의 목표는 올 연말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 정상에 오르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 서부의 안데스 산맥에 있는 해발 6960m의 아콩카과 정상은 빙하와 만년설로 장관을 이루지요. 이번 원정 등반은 킬리만자로보다 더 높을 뿐 아니라 어렵고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 초 제주도 한라산 동계 훈련에 참가해 겨울 산행에 대해 체계적으로 교육받았습니다. 최근에는 한국등산학교에 입교해 매주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1박 2일 동안 진행되는 등반 이론과 실기 교육을 6주간 배우고 있습니다.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랐을 때 한 동료는 제게 물었습니다. "팀장님, 다음에 또 도전하시겠어요?" 당시 강풍과 추위, 그리고 졸음에 지쳐 있던 저는 1초도 망설임 없이 "노(No)"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하산 후 킬리만자로 정상을 뒤돌아보며 마음을 바꿨습니다. 새로운 등반을 준비하기로…. 그리고 오늘도 다시 배낭을 꾸립니다. 남미의 가파른 암벽 위에서 추위에 맞서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에 도전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지요.

'나, 또다른 나' 제보 이메일 m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