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최하등급 로열석(席)

18세기 파리 오페라극장 '팔레 루아얄'에 왕은 공연 시작 후에 도착하고 공연이 끝나기 전에 나갔다. 관람보다는 폼 잡는 행사였다. 홀 양쪽 벽에는 특별관람석인 발코니 모양의 '박스(box)석'이 26개 있었다. 무대를 향해 2층 오른쪽 맨 앞 박스에 왕이 앉았고 반대편 왼쪽 박스에 왕비가 앉았다. 이 박스들은 사실상 무대 위에 있었기 때문에 공연을 보기엔 불편했다. 아래층 관객들에게 자신들의 화려한 의상과 위세를 으스대기엔 좋았다.

▶당시 유럽 극장들은 1층을 정원의 화단을 뜻하는 '파르테르'라고 했고, 관객은 서서 공연을 봤다. 600~700명쯤 되는 관객들은 담배 피우고 술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심지어 개까지 왔다갔다했고 소매치기도 있었다. 이들은 흥분하고 소리질렀지만 그것이 오히려 공연의 감동을 극대화했다. 뒷날 '진정한 심판자들'로 칭송되자 오스트리아 '부르크 극장'은 무대 앞에 심판자를 위한 '파르테르 노블 석'을 따로 만들었다.

▶1925년 서울·시카고 야구시합이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보통권 70전, 학생권 40전이었고, 번호를 붙인 '특별석'은 1원20전을 받았다. 1960~70년대 이 특별석은 'S석'이란 영어 이름으로 바뀌었고, 얼마 안 있어 공연장 1층 앞쪽 중앙에 '로열석'이 등장했다. '왕이 앉는 자리'가 아니라 그냥 가장 비싼 자리였다. 88년 서울올림픽 무렵 대형공연 로열석이 너무 비싸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탈리아 오페라 '투란도트'는 로열석이 12만원이었다. 보통 근로자의 한 달치 생활비였다.

▶최근 공연장에는 로열석 위에 'VIP석'이 생기고, 다시 그 위에 프레지던트 혹은 프리미엄을 뜻하는 40만원짜리 'P석'까지 생겼다. 가장 비싼 좌석을 뜻했던 로열(R)석이 지금은 1층 가장자리나 뒷자리로 밀려났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1층 950석은 최하등급이 R석인 때도 많다. 나머지 층을 다 합해 2000석이 넘지만 P석·VIP석·R석이 대부분이다. 예술의전당은 앞으로 표준좌석 등급제를 실시해 이것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예술의전당은 P석·VIP석을 없애 R·S·A·B·C·D '6단계 표준등급'으로 되돌리고, R석을 전체 좌석의 30% 수준으로 제한하겠다고 했다. '뮤지컬의 메카'인 런던 웨스트엔드는 1층을 외양간이란 뜻의 '스톨(stall)', 로열 박스석이 있는 2층을 '로열 서클'이라고 부를 뿐 좌석은 별다른 명칭 없이 가격만 표시하는 게 관행이었다. 요즘은 그곳도 조금 달라지고 있다고는 한다. 그래도 우리 공연계의 좌석 이름에 낀 거품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