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 현실로… 글로벌 자금도 美로 대피

그리스의 정치 리스크로 인해 글로벌 투자금이 위험자산에서 안전자산으로 대이동을 시작했다. 그리스가 15일(현지시각) 연립정권 구성에 결국 실패하고, 다음 달 17일 재총선을 실시키로 하면서 디폴트(채무불이행)와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탈퇴 우려가 한층 더 커진 데 대한 시장의 대응이다.

이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첫 정상회담을 갖고 "그리스의 경제 성장을 위한 추가 조치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우리는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지만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불식시키진 못했다. 또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국제통화기금) 총재는 "그리스의 질서 있는 탈(脫)유로 방안은 고려할 만한 옵션"으로 언급하며 그리스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였다.

◇그리스, 외부 지원 없으면 두 달밖에 못 버텨

그리스 은행권에선 14일 하루에만 7억유로(1조원)의 예금이 은행을 빠져나가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 징후가 나타났다. 이날 카롤로스 파풀리아스 그리스 대통령은 정당 지도자들과의 회동에서 "현재 (그리스) 금융권의 자금 여력이 매우 취약한 상태이며 언제라도 '패닉(공황)' 사태로 확산될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하다"고 경고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2010년 5월 이후 현재까지 그리스 은행에서 빠져나간 총 자금은 500억유로로, 그리스 국내총생산(GDP)의 20%에 달하는 규모다.

그리스 중앙은행이 현재 보유한 현금은 25억유로로 7월 초면 바닥이 날 전망이다.

그리스 내 여론은 다음 달 17일 재총선에선 반(反)긴축을 선거 공약으로 들고 나온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당이 다수당이 되는 쪽에 기울어져 있다. 새 정부가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 등과 긴축 협상에 실패하고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면 디폴트(채무불이행)는 피할 수 없다. 뱅크런 징후는 이런 시장의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뱅크런이 빠르게 확산되면 그리스가 한 달도 버티기 힘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오정근 고려대 교수는 "그리스는 국가 재정 통계를 부풀린 경력이 있는 나라로 현재 25억달러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며 "자본금이 부족한 은행들에 뱅크런이 일어나면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잔고도 순식간에 바닥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파국은 피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은호성 한국은행 팀장은 "그리스 국민의 80%가 유로존 잔류를 원하고 있고, 긴축 반대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시리자당(제2당)도 완전 긴축 반대가 아니라 성장을 반영하자는 정도의 입장이기 때문에 재총선으로 정권을 잡더라도 EU·IMF 등과 타협에 나설 것"으로 예상했다.

◇안전자산으로 쏠리는 글로벌 자금

그리스발(發)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글로벌 투자금은 위험자산인 유로화, 남유럽 국채, 주식 등에서 빠져나와 미 달러화, 미 국채 등으로 재빨리 옮겨타고 있다.

15일 미국 증시는 뉴욕의 제조업경기가 좋아졌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0.5% 하락했다. 영국·독일·프랑스 등도 0.5~0.8% 하락세를 보이며 투자자들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했다. 이날 유로 대비 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0.7% 떨어지면서 유로 약세, 달러 강세를 보였다. 미국 국채에 수요가 몰리며 10년물 미 국채 금리는 전날과 같이 7개월 만에 최저 수준을 유지했다. 반면 이탈리아·스페인의 국채금리는 올랐다(국채값 하락).

한국 금융시장도 그리스발 악재의 영향으로 16일 코스피지수가 전날보다 3% 이상 급락한 1840에 거래를 마쳤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하루 동안 11원 넘게 올랐다.

일본·중국 증시도 1% 넘게 떨어졌다. 한국 증시의 낙폭이 유난히 컸던 것은 애플이 삼성전자 대신 일본 반도체업체 엘피다에 모바일용 D램 반도체를 대량 주문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삼성전자 주가가 급락한 영향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국내 금융시장의 불안 정도는 지난해 9월 그리스 국가부도 위험이 부각되고, 프랑스 은행들의 신용등급이 줄줄이 강등됐을 때(9월 22~23일)보다는 변동폭이 덜한 편이었다. 당시 주가는 5.7% 떨어지고, 환율은 29.9원 올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