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속에 대용량 저장 가능… '꿈의 메모리' 나온다

D램 메모리의 속도와 플래시메모리의 데이터 저장능력을 한몸에 가진 메모리는 없을까.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가 최근 영국에서 발표됐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연구팀은 지난주 "소모전력은 플래시메모리의 1000분의 1에 불과하면서 데이터 처리속도는 100배 빠른 메모리 소자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플래시메모리는 스마트폰이나 디지털카메라 등 휴대용 기기의 저장장치로 쓰이는 반도체.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하지만 고속의 연산작업이 필요한 컴퓨터의 메인메모리에는 플래시메모리보다 데이터 처리속도가 10배 이상 빠른 D램이 쓰인다. 우리가 사용하는 IT제품에 D램과 플래시메모리가 골고루 들어가는 것도 한 종류의 메모리반도체로는 IT기기가 필요한 성능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나노(10억분의 1m) 크기 소자를 적당한 재료로 가공하면 가해준 전류의 방향에 따라 저항도 따라 변한다는 원리를 이용했다. 전류의 방향과 크기를 바꿔주면 저항값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나노 소자는 전기가 끊어져도 마지막으로 전류가 흘렀을 때의 저항값을 기억하는 특성이 있다. 이는 밀리미터(1000분의 1m)나 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 크기의 회로에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연구팀은 물의 흐름과 방향에 따라 지름이 달라지는 파이프로 이 원리를 설명했다. 이 파이프는 물의 양과 방향에 따라 지름이 커졌다가 작아지고 물이 끊기면 마지막으로 물이 흘렀던 때의 지름을 유지한 채 얼어붙는다. 그리고 물이 다시 흐를 때까지 그 상태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는 전원이 꺼지기 전까지의 데이터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플래시메모리와 같은 비휘발성 메모리의 특성이기도 하다.

연구팀은 이 원리를 이용해 다양한 데이터를 처리하면서 전류가 끊어진 상태의 전자상태를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를 개발한 것이다. 연구팀의 궁극적인 목표는 메모리 하나에 D램과 플래시메모리의 장점을 모두 담은 '유니버설 메모리' 개발이다.

연구팀이 이용한 원리는 실은 1971년 UC버클리의 레온 추아 교수가 처음으로 예견한 전자소자에 바탕을 둔 것이다. 추아 교수는 순수한 수학적인 추론만으로 통과하는 전류의 양과 방향 등 기존 상태를 모두 기억하는 특별한 소자를 고안한 뒤, 이를 '멤리스터'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의 이론을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트랜지스터 기술이 빠르게 발달하고 있는 와중에 멤리스터가 크게 쓸모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 이론도 너무 난해했기 때문이다.

40년간 묻혀있던 멤리스터에 처음 주목한 것은 미국 휼렛패커드 연구팀이었다. 휼렛패커드 연구팀은 멤리스터가 고속의 데이터 처리와 메모리 기능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휼렛퍼커드 연구팀은 2008년 초보적인 멤리스터 소자를 만들어, 유니버설 메모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네이처에 발표된 이 논문은 미국 주간지 타임이 뽑은 그해 최고의 발견에 선정될 정도로 반향이 컸다.

멤리스터가 상용화돼 컴퓨터 시스템 메모리 등으로 이용될 경우, 크기는 작고 에너지 소모는 적으며 부팅 시간이 획기적으로 짧은 제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후 멤리스터를 이용한 유니버설 메모리 연구에 불이 붙었다.

멤리스터는 또한 뇌 과학자들로부터도 주목을 받고 있다. 데이터를 저장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처리할 수 있는 멤리스터는 뇌신경을 구성하는 뉴런과 가장 흡사한 전자소자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자소자로 뇌 신경망을 흉내 낸 회로를 만들려면 도시 하나를 채울 정도의 천문학적인 부품이 필요하다. 멤리스터를 이용하면 그보다 훨씬 작은 크기로 뇌신경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멤리스터를 이용해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유니버설 메모리(Universal Memory)

메모리 하나로 D램·플래시메모리 등 여러 종류의 메모리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통합형 만능 반도체. 사용하는 부품이 줄기 때문에 IT기기의 제조원가와 소모전력을 낮추고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멤리스터(Memristor)

전류의 흐름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저항의 강도가 바뀌는 새로운 전기 소자. 메모리(Memory)와 저항(Resistor)의 합성어. 속도가 빠르고 저장용량이 큰 메모리반도체를 만드는 데 쓰인다. 2008년 휼렛패커드가 초보적인 단계의 멤리스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