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금슬금 빠지는 예금… "그리스, 슬로 뱅크런(slow bank run)"

그리스발 금융불안 탓에 전 세계 투자자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에선 은행의 신용도가 투기등급으로 떨어졌음에도 은행 앞에 인파가 장사진을 이루는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 사태)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럴까?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들은 '슬로 모션 뱅크런(Slow-motion bank run)'이란 신조어로 이런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를 포함한 남유럽 불량국가들에서 재정위기가 만성질환이 되면서 속도는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예금이 빠져나가는 현상이 일상화됐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경우 전체 은행 예금잔액이 작년 5월 2307억유로에서 지난 3월 1739억유로로 최근 10개월 새 570억유로나 줄었다. 감소액은 그리스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그리스를 탈출한 돈은 독일 등 안전한 나라 은행에 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옛 화폐로 돌아가면 휴지조각된다는 걱정 탓

유럽중앙은행(ECB)의 지속적인 유동성 공급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등지에서 슬로 모션 뱅크런이 계속되는 이유는 유사시 자기 예금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그리스가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거나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을 이탈하면 정부가 예금동결 조치를 취하고, 예금자들은 돈을 뺄 수 없게 된다. 이후 그리스가 전통 화폐인 드라크마 체제로 회귀하면 화폐 가치가 유로 대비 50% 이상 급락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예금의 가치도 떨어진다는 뜻이다. 또 재정위기국 국채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로 휴지조각이 되면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해 예금지급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도 예금 이탈을 촉발하는 요인이다.

금융전문가들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현실화될 경우 다른 남유럽 재정위기 국가들에서도 광범위한 뱅크런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각국 중앙은행의 분석을 인용, 이탈리아는 전체 예금의 48%, 스페인은 30%, 포르투갈은 21%가 초단기 예금이라 언제든지 인출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유로존, 뱅크런 확산 막기 위한 방화벽 구축

유로존에선 광범위한 뱅크런 발생을 막기 위해 미리 방화벽을 쌓는 작업을 시작했다. WSJ는 20일(현지시각) "범유럽연합(EU) 차원에서 은행 예금을 보증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스가 무너질 경우 뱅크런이 다른 나라로 확산될 가능성을 막기 위한 비상조치다. 다른 유럽 국가 은행에서도 예금을 인출하게 해준다든지, 범유럽판 예금보험공사를 만들어 예금지급 보증을 해준다든지 다양한 방법들이 거론되지만 아직 구체화된 건 없다.

또 FT는 미국과 영국도 사상 처음으로 은행 시스템 붕괴에 대한 대비책을 함께 마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상은 '시스템상 중요한 금융기관(G-Sifis)'으로 최소한 미국은행 5개, 영국은행 2개가 거론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FT는 그러나 "유로화에 대한 공고한 믿음이 회복되지 않고선 이런 조치들이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