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짜리 지하보도공사, 주민이 '예산낭비' 밝혀

22일 오후 서울시 서대문구 천연동 교남지하보도에 내려가자 번쩍이는 대리석 벽이 나타났다. 모조품이지만 고(故) 김기창 화백 그림 16점이 벽에 걸려 있었다. 사람이 지나는 지하보도라지만 폭이 6m로 자동차 2대가 동시에 지날 만큼 넓어 차도처럼 보였다. 길이는 31m. 10분 동안 이 넓은 지하보도를 지나는 사람은 5명에 불과했다. 반면 지하보도에서 20m 떨어진 지상 횡단보도엔 신호가 바뀔 때마다 수십명이 지나갔다.

서대문구청은 사람이 거의 지나지 않는 이 지하보도에 10억원을 들였다. 대부분 예산은 서울시가 준 특별교부금. 설계용역에 구비 5000만원이 배정되었고, 내부 철근과 벽을 보수하는 공사에 서울시 특별교부금 12억원이 배정됐다. 이 중 10억여원이 실제 공사비용으로 사용되었다. 공사는 지난 2009년 1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26개월 걸렸다. 주민 오민조(47)씨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지하보도에 10억을 썼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돈이 썩어나지 않고서야 이런 공사를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서대문구 주민들 203명은 공사가 끝나기 한 달 전인 지난해 5월 교남지하보도 공사에 대한 감사를 서울시에 청구했다. 바로 옆에 횡단보도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미 2010년 2월 서울지방경찰청 교통안전시설 심의회가 지하보도 근처에 횡단보도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음에도 지하보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주민감사 청구를 받은 서울시는 2011년 11월부터 7개월 동안 감사를 했다. 그 결과 문제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10년부터 인근에 횡단보도가 설치되기로 해 교남지하보도 폐쇄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서대문구청은 이를 무시한 채 공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게다가 시공업체가 무단으로 바뀌고 적법한 안전검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드러난 문제만 10여건에 달했다.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서대문구청에 제재를 내리고 교남지하보도 공사와 관련된 구청 직원 2명에 대해 중징계를 지시했다. 이 사업에 관여한 다른 8명에 대해서도 경징계 등을 내렸다. 또 설계용역비 300여만원을 회수하고 해당 업체에 대해 경고조치를 내렸다.

이 같은 서울시의 감사 결과를 이끌어낸 데엔 주민들 노력이 컸다. 특히 지하보도 근처에서 휴대전화 대리점을 운영하던 오민조씨는 2010년 7월부터 시작된 공사가 완공 예정인 그해 12월이 지나서도 끝나지 않아 영업에 불편을 느꼈다. 그는 직접 사정을 알아봤고 바로 근처에 횡단보도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씨는 이후 석 달 동안 공사의 부당성을 알리는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며 주민감사청구인명부에 202명의 서명을 받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교남지하보도 공사와 비슷한 주민청구가 한 해 20여건이 들어온다. 이 중 실제로 문제가 있다고 밝혀지는 경우가 절반 정도에 이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