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비판소설 '이정구(李鄭具)' 쓴 전 경제관료 이영탁

전직 고위 공무원이 생애 첫 장편소설을 내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교육부 차관, 국무총리 국무조정실장(장관급) 등을 거쳐 초대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이사장을 지낸 이영탁(65) 현 세계미래포럼 이사장이다.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공무원 경력 대부분을 재무부·경제기획원 등에서 보낸 '경제통'과 소설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젊은 시절 문학청년이었다거나, 남몰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고 살았던 것도 아니다.

그가 소설을 쓴 데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작년 초 튀니지에서 일어난 '재스민 혁명'이 23년이나 권좌를 지켰던 벤 알리 정권을 불과 두 달 만에 무너뜨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 이사장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후진국에선 시민들 분노가 독재권력을 향하지만, 선진국이라면 어디로 향할까?' 그가 내린 해답은 '기업권력'이었다.

"우리 사회 1%의 기득권층과 나머지 99% 사이의 대립이 날로 격화되고 있습니다. 신에게 암소를 갖게 해 달라고 빌던 농부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자, 차라리 옆집 농부의 암소를 죽게 해 달라고 비는 일화가 있지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으면 가진 자를 증오하고 가진 사람들 몫을 뺏으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이사장은 영국 런던 실업자 난동과 월가(街) 시위를 예로 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사회의 1%가 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이시장이 정의 내린 1%는 재물이 많은 재족(財族), 권력을 가진 정족(政族), 관족(官族), 법족(法族), 의족(醫族), 교족(敎族), 언족(言族), 종족(宗族), 노족(勞族) 등 9개 벌족(閥族)이다.

특히 기업권력인 재족이 부정한 권력세습을 중단하고 재산 기부 등 사회 활동을 해서 그간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22일 출판된 소설 '이정구'(미래를 소유한 사람들)는 재족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주인공 이정구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70세 재벌그룹 회장으로 나오는 이정구는 국내 3대 기업 오너의 성(姓)을 따서 만들었다.

"원래 경제사회과학 도서로 기획하고 원고지 7000~8000페이지 분량을 썼는데 읽어보니 내가 봐도 너무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쉽게 읽게 하기 위해선 소설 형식으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 써 보는 소설이라 구성 형식을 잡거나 캐릭터를 설정하는 게 쉽지 않아 알고 지내던 작가, 출판사와 끊임없이 상담하고 조언을 구했다. 이 이사장은 "주제가 딱딱해서 '과연 재미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생한 에피소드와 대화, 어머니와의 아련한 추억 등을 가미해 독자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 선거 투표일인 올해 12월 19일, 벌족 시리즈 2권에 해당하는 정족(政族) 이야기를 집필하기 시작해 내년에 출판할 예정이다. 3권부터는 크라우드 소싱 방식으로 많은 전문가 및 일반인들과 공동 집필하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소설 내용을 영화로도 제작해 보고 싶어 모 제작사를 찾았더니 '이런 내용이면 대기업 광고가 안 들어온다'고 거절당했다고도 했다.

"움켜쥔 손으론 악수를 할 수가 없지요. 우리 사회가 변하려면 이정구처럼 1%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해요. 그 메시지를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