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16]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된다면 행복할까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가 되고 싶다. 내가 아닌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 말이다. 미국 추리소설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가 1955년 발표한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가 시대를 뛰어넘어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변주되고, 대중을 매혹하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1999년의 동명 영화(국내 개봉 제목은 '리플리')에서 주인공 톰 리플리(맷 데이먼)는 가진 게 없는 청춘이다. 낮에는 호텔 벨보이로, 저녁에는 피아노 조율사로 바쁘게 일하지만 근근이 생활을 유지할 뿐 희망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사치스럽다. 호텔에서 손님의 양복 어깨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주는 모습은 많은 걸 상징한다. 그가 프린스턴대학의 교복을 입고 피아니스트라고 신분을 속일 때만 해도 귀여운 수준의 거짓말이었다. 그러던 리플리가 우연히 부호의 아들 디키(주드 로)와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리플리와 비교해 디키는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다. 멋진 외모, 많은 돈, 아름다운 여자 친구(귀네스 팰트로) 그리고 평생 남의 위에 군림해온 사람에게만 있는 거만하고 무심한 눈빛까지. 그런 디키를 리플리가 끔찍하게 동경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몰래 옷장을 뒤져 디키의 옷으로 휘감고 거울 앞에 선 리플리의 모습은 섬뜩하다. 더 슬픈 건 그 비루한 열망을 디키에게 들키고 만다는 것이다.

리플리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 디키의 삶을 그대로 복제하는 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리플리'라는 이름의 모든 걸 완전히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숨소리도, 마음도, 감정까지도. 그건 불가능하므로 인형 옷을 입듯 타인의 인생을 뒤집어썼다. 둘의 출발선이 아예 달랐다는 것, 디키에게 부자 아버지가 있고 리플리에게는 없다는 것이 그의 범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파괴하고 혼자 남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 처연한 연민이 솟아오르는 걸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남자는 우리 모두의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욕망의 그림자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