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고아 제자와 선교사 선생님… 머리에 함께 눈내린 그들, 52년만에 만났습니다

6·25 전쟁 직후 한국을 찾아 20여년간 전쟁 고아에게 직업교육을 해주며 보살폈던 선교사 30명이 50여년 만에 한국에서 제자들과 다시 만났다.

23일 오후 5시 서울 광진구에 있는 세종대학교 컨벤션홀. 신진우(70)씨는 눈과 입가에 주름이 곱게 잡힌 벽안의 트와일라(81)씨의 손을 꼭 잡고 놓지 못했다. 그는 "철공 실습을 하다 눈을 다쳤는데 투알라(투와일라의 한국이름) 선생님이 치료해준 것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이날 만남은 6·25 때 아버지를 잃은 신씨가 1954년 미국 선교사들이 만든 직업학교에 입학한 지 58년 만이다. 졸업하면서 두 사람이 헤어져 보지 못한 지는 52년이나 됐다.

머리가 희끗한 은헌기(65)씨도 학교를 졸업한 지 45년 만에 백발의 선교사 리랜드 윌리 보스(83)씨를 만났다. 신장 175㎝의 보스씨와 160㎝의 은씨는 망설임 없이 힘껏 안았다. "반갑습니다." 보스씨가 서툴지만 똑똑한 발음으로 말하자 은씨는 "정말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제자의 희끗해진 머리를 본 보스씨는 "이제는 친구가 됐구나"라고 웃었다.

경북 상주시 성동동에서 태어난 은씨는 6·25전쟁 때 군무원이던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지만 네 남매를 키울 형편이 안 돼 고아원에 맡겨졌다. 열네 살 되던 해 공부와 기술을 함께 배울 수 있는 직업학교에 들어갔다. 은씨는 "배 곯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 공부까지 가르쳐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직업학교의 정원은 200명이었지만 경쟁은 치열했다. 입학시험을 쳐서 아이들을 뽑았는데 경쟁률이 10 대 1이 넘곤 했다.

1958년 한국에 온 보스씨는 학생들에게 농업기술을 가르치며 15년을 살았다. 갓난아이였던 딸과 아들은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고, 막내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한국 이름이 '보우수(寶雨水)'예요. 보물, 비, 물. 한국인들이 '농업을 가르치는 선생님 이름으로 딱 맞다'고 지어줬지요." 일본에서 목장을 경영하는 은씨는 "보우수 선생님께 농업을 배워 내 평생의 직업을 찾았으니 큰 은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예전 추억을 되새겼다. "모내기 하던 것 기억나세요?" "모내기 끝나고 나무그늘에서 먹던 김밥 맛이 최고였어요."

수십년 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들은 행사장 곳곳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구에서 올라온 김청은(65)씨는 캔브런크(83)·트와일라씨 부부를 만나고선 목이 멨다. 김씨는 "중1 때 결핵에 걸린 나를 매일 간호해준 투알라 선생님을 평생 못 잊는다"고 했다. 6·25 때 양친을 잃은 김씨는 "그때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당시 20대였던 투알라 선생님께 실례가 될까봐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했다"면서 "늘 마음속에선 어머니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