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II] [주목, 이 사람] "문화재 보호하는 건 내 동네에 대한 의무"

왕릉골 소년은 '왕의 무덤'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고려의 마지막 왕과 왕비가 우물에 빠져 목숨을 끊었는데, 삽살개 한 마리가 그 곳을 지켰지. 마을 사람들이 그 삽살개를 보고 돌아가신 곳을 알았어. 두 분 무덤 앞에 있는 삽살개 석상이 그래서 생겼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비운의 왕과 왕비가 도망치던 모습을 상상하며 자란 소년은 마을 뒤 작고 초라한 무덤에 얽힌 전설이 마음 한 켠에 내내 남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화재와 인연

송강문학관 이은만(71) 관장이 고양시 향토사학자로 일생을 보내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서울로 유학간 지 5년째인 성동고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역사 선생님이 내 준 '자기 고장의 역사와 문화재를 알아오라'는 숙제를 하려고 동네 뒷산을 올랐다. 고려시대 마지막왕인 공양왕릉을 찍으려고 카메라도 준비해갔다. 그런데, 작은 무덤 앞에 으레 서 있어야 할 비석이 밑부분만 남은 채 윗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근처를 샅샅이 뒤져 겨우 개천에 빠져 있는 비석 윗부분을 찾아냈다. 방학이 끝나고 그는 학교에서 순식간에 스타가 되었다. "역사 선생님이 반마다 돌아다니며 '우리 은만이가 이런 걸 써왔다'고 자랑하시고, 또 그걸 사학계에 내신 겁니다. 사학계에서 고려 마지막 임금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었는데 새로 발굴되니까 신이 났죠. 고려 말 역사가 새로 써진 겁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 땅에 내려왔을 때 또 한 번 공양왕릉과 인연이 얽힌다. 한 달 후면, 왕릉을 포함한 3900평 땅이 공매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문화재관리국과 이선근 박사(역사학자)에게 진정서를 냈다. 그 공매는 기한 일주일을 남겨놓고 아슬아슬하게 취하되었다. 그 후, 공양왕릉은 1970년 2월 28일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서삼릉(사적 제200호)보다 석 달 앞선 지정이었다.

그 뒤로 문화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강원도에서 광산 개발로 재력가가 되고 개인 사업을 몰두하며 가정과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던 1988년, 4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고양문화원의 원장이 되었다. 당시 고양시는 신도시 개발로 하루아침에 동네 하나가 흔적 없이 사라질 때였다. 포크레인이 갈아엎은 땅은 동서남북 분간이 어려운 낯선 땅이 되어버렸다. 당시 문화원장이 할 일은 자칫 사라질지 모를 문화재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옛 동네가 다 없어지기 전에, 지명유래집을 만들어야겠다 싶었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가 뭐고 무얼 하던 곳인지 (기록에 남기려고) 대학생 21명에게 채집과 기술 방법을 교육시켜서 동네마다 보냈어요. 그래서 나온 게 '고양군 지명유래집'이고, 그 과정에서 밤가시 초가가 살아남은 겁니다."

일산 밤가시 초가는 동네에서 '괴짜 집'으로 통했다. 이웃 집들이 신식 기와로 일찌감치 지붕을 모두 교체해도 밤가시 초가 주인은 선조가 해 온 방식을 버릴 수 없다며 초가지붕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은만 문화원장이 이 집의 가치를 알아채고 개발에서 좀 빼주기를 요청했지만 토지개발공사에서 난색을 표했다. '이 광활한 땅에 문화재가 한 개라도 있어야 된다'는 이 원장의 입장과 '이미 계약이 완료되었고 1500평을 양보할 수 없다'는 토지개발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이은만 원장은 경기도 학술단체를 찾아갔다. 손보기 교수 등 문화재 심의위원들이 밤가시 초가의 가치를 인정했다. 포크레인으로 집을 파내기 전전날, 급한대로 문화재 가지정을 해 살렸고, 1991년 10월 19일 밤가시 초가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8호로 선정되었다.

◇문봉서원 복원이 마지막 과제

"(문화재를 찾아내고 보호하는 것은) 보람 이전에 내 동네에 대한 의무요. 어떤 인물이 어느 마을에 많이 살았나가 자랑인 거요. 공자가 태어난 고장은 공자로 인해서 자랑이고, 매사추세츠는 링컨이 태어나서 자랑이고, 우리 고장은 송강이 살았고, 최영 장군이 살았으니 문무를 겸비한 최고의 고장인 거요."

현재 그는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에 살고 있다. 옆 동네가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듣던 송강고개, 송강낚시터, 송강보가 정철의 그 '송강'인 줄은 물랐다고 한다. 지명유래집을 만들면서 송강 정철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고, 그 후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겨 부지런히 송강의 행적을 알리고 있다.

지금의 원당역도 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2년, 지하철 3호선 노선에 없었던 원당역을 유치하겠다고 나선 그는 철도청에서 '이미 삼송~화정으로 노선이 확정되어서 원당으로 돌아가면 1년 공기 연장, 720억 공사비 추가발생'으로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원당동 주민 2만명 서명운동을 하고 김종필 국무총리를 직접 만나 '신도시 개발로 밀려난 원주민들이 원당에 모여 살고 있고, 고양시청도 있는데 지하철역이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설득해 원당역 확정을 끌어냈다.

이 관장은 지난해 두 번의 종양제거 수술을 했다. 그는 자신의 체력이 허락하는 한 반드시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 '문봉서원 복원'이다. 고양 8현을 모셨던 경기도의 대표적 서원인 문봉서원은 조선시대 서원철폐 정책에 따라 사라졌다. 당초 문봉동 자리에 복원하는 것은 어려워 차선으로 현재 원흥지구 내 역사공원에 이전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추강 남효온, 석탄 이신의 등 고양 팔현은 도학의 체계를 이루신 훌륭한 학자이십니다. 고양시민뿐 아니라 전국 유림의 숙원 사업이자 제가 22년간 추진해 온 일이 이번에 꼭 이뤄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