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선천성 심장기형 수술분야 선구자… 조범구 한국심장재단이사장

조 이사장은 한국 선천성 심장기형 수술 분야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 세브란스병원에 국내 처음으로 심혈관전문센터가 만들어지는 산파 역할을 했고, 이후 세브란스병원장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중앙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한국에서 처음으로 미국 흉부외과학술원의 정회원이 되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는 귀국 직후부터 25년간 매월 둘째 주 일요일마다 부산의 심장병 무료 상담소를 방문해 100~200명의 환자를 진단하고, 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한 무료수술까지 도맡다시피 했다. 그 공로로 청룡봉사상, 보령의료대상 등을 수상했다. 2004년 정년 퇴임한 그는 이제 심장재단의 수장(首長)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 평생 심장과 관련된 일을 해온 그에게 이보다 적합한 일도 없어 보였다. 지난 15일 수술 환자의 경과를 살펴보기 위해 찾아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센터에서도 그는 "내 운명을 걸었던 곳"이라고 말했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한국선 한 해 300명 심장 수술하던 시절 하루 30명씩 수술하는 美병원으로 연수… 이젠 개도국 의료팀 초청해 우리가 가르쳐"
귀국 후 25년간 부산 왕진 "나만 기다리고 있던 입술 파란 아이들 약 2000명 수술… 하루 4~5명씩 하기도 수술해준 아이, 다 커서 주례 부탁하러 와"
이젠 北으로 눈 돌릴 때 "신생아 1% 심장기형… 北에 환자 많을 것 10년째 북한 들어가 수술해주는 후배 환자 신상 물으면 '알 거 없시요' 한다더라"

"우리 세대에서 다른 나라의 심장병 환자들을 수술해주고 개발도상국가 의료진을 대상으로 연수까지 시켜줄 수 있다는 것, 정말 대단한 일 아닌가요."

한국심장재단 조범구(73) 이사장은 36년 전인 1976년 미국 텍사스 휴스턴의 심장센터 연수 시절을 떠올리는 일이 요즘 부쩍 잦아졌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 외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때였다. 한국에서 1년에 불과 200~300건의 심장수술을 해내는 수준이었고 그마저 사망률이 높았다. 그는 전 세계에서 1년에 단 한 명의 펠로우를 선발하는 미국 흉부외과학회의 초청을 받아 연수기회를 잡았다. 6개월 동안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갈 정도로 매일같이 응급실에서 씨름하던 그에게 미국은 별천지였다. 휴스턴의 텍사스 심장연구소 한 곳에서만 하루 30명씩 척척 수술을 해내면서 전 세계 환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수술실 9개에 중환자실만 7개인 그곳은 병원이라기보다 '공장'에 가까웠다. 이곳에서 그는 미국의 선진 심장수술법을 익히고 돌아왔다.

그가 취임한 이후, 심장재단은 중국과 몽골 의료팀 5명씩 10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삼성서울병원과 세브란스병원에서 연수를 지원하고 있다. 이제 국내 심장병 분야는 도움을 받던 쪽에서 주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조 이사장은 "그동안 단순히 해외 환자를 수술해주는 단계를 넘어 해외 의료진이 스스로 심장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도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할 때"

―70년대 우리나라의 심장병 환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나.

"선천성 심장기형 수술은 돈이 많이 들고 무척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수술을 받지 못하고 미국으로 보내지는 아이들이 많았다."

―지금도 미국으로 가는 환자가 있나.

"지금은 가라고 해도 안 갈 것이다. 과거에야 우리가 가난했고 의료보험도 없다 보니 외국으로 많이 보냈던 것인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 재단만 해도 연간 선천성 심장병 환자 500여명 등 1100여명의 수술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 분야 의료보험제도가 잘되어 있어서 선천성 심장병 환자의 본인 부담률은 5%까지 떨어졌다. 국내 의료진들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나라 환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한국심장재단에서는 지금까지 몇 명 정도를 도왔나.

"지난 1984년 이순자 당시 대통령 부인에 의해 '새세대 심장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후 지금까지 2만9200여명의 수술을 지원했다. 현재 우리 재단은 과거 정권 인사들과는 무관한 비영리재단으로 운영되고 있다."

―해외 지원 실적은.

"지금까지 646명의 해외 환자를 국내로 초청해 수술했다. 하지만 이것은 근원적인 해결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취임한 이후 개발도상국의 의료팀 5명을 한꺼번에 불러 가르칠 수 있도록 정관을 개정했다. 현재 몽골과 중국에서 두 팀이 들어와 있다."

―굳이 5명씩 지원하는 이유는.

"내가 직접 심장 수술을 했던 입장에서 의사 1명 가르쳐서는 효과가 없다. 체중 3㎏인 신생아의 조그마한 심장을 수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정밀한 작업이다. 수술을 담당하는 흉부외과 의사와 진단을 내리는 소아심장 전문의, 마취전문의, 인공심폐기사, 중환자실 간호사 이렇게 최소한 5명 제대로 된 팀이 꾸려져야만 수술의 성공률이 높다."

◇'파란 입술'의 아이들과 함께한 25년

처음에는 '어디 한번 가서 보기나 하자'는 생각에서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25년 동안 반복된 '부산 왕진 여행'의 첫 걸음이 될 줄은 몰랐다. 1978년 어느 날, 갓 귀국한 그에게 부산 메리놀병원 간호사였던 김 미카엘라 수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산에 환자가 많으니 한번 내려와서 봐달라"고 한 것이었다.

조 이사장은 그날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메리놀병원 강당에서는 어린 환자 100여명에 딸린 부모까지 300여명이 오직 그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가 잘 돌지 않아 입술과 얼굴이 파래지는 '청색증' 증상이 완연한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단 며칠이라도 수술을 늦추면 죽을 수도 있는 아이들의 눈망울과 그 부모들의 애절한 눈길이 결국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조 이사장은 "그 아이들을 뒤로 하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며 "봉사가 아니라 의사로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진료를 마치고 돌아서며 "다시 오겠다"고 한 약속을 그는 퇴임할 때까지 지켰다. 지금은 세브란스 병원 후배들이 그의 뒤를 이어 매달 둘째 주 일요일마다 부산의 심장병 무료진료소를 찾고 있다.

―혼자 부산의 심장병 상담소를 다녔나.

"처음 10년쯤 혼자 다녔다. 누구 다른 사람한테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교통비 식비 모두 개인 부담이기 때문에 선뜻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물론 나중에는 세브란스 후배·제자들과 함께 다녔다."

―병원이나 요양소에 후원금이 들어오지 않았나.

"후원금은 그런 데 쓰는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환자들에게 지원해야 한다. 점심은 대부분 짜장면으로 때우고 진료소에 갔고, 후배들도 자신들의 비용을 들여서 가고 있다."

―말이 25년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입술이 파랗게 된 자식을 안은 부모들이 몰려와 쳐다보는데 어떻게 그만둘 수 있나. 김 미카엘라 수녀님도 대단한 분이다. 공항에 나갔다가 기상이 나빠 비행기가 못 뜬다 해도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오셔야 해요'라는 수녀님의 말 한마디에 기차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로 발걸음을 돌렸다."

―김 미카엘라 수녀님은 어떤 분인가.

"부산에서 심장병 환아들을 돌보며 수술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국내 의료기관에 보내고 미국으로도 보내는 일을 했다. 미8군에 근무하던 한 군의관으로부터 내가 미국에서 막 연수를 마치고 세브란스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해온 것이었다."

―무료 수술은 어떻게 하게 됐나.

"세브란스병원에 기금이 있었다. 지원자는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했다. 병원 경영진들을 직접 데리고 부산에 가서 아이들을 보여준 뒤 무료 수술 허락을 받아내곤 했다."

―지금까지 심장병 아이들을 몇 명 정도 수술했나.

"세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한 2000명 정도. 수술을 많이 할 때는 하루에 4~5명씩 하기도 했다."

―잊지 못할 환자는.

"내가 처음으로 선천성 복합심장기형 수술을 성공시킨 환자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또 부산 진료소에서 엄마 품에 안겨 줄을 서서 기다리던 아이가 숨지는 안타까운 일을 겪기도 했다. 건강하게 자라서 주례를 부탁하거나 박사 학위 논문을 들고 오는 그 옛날 '아기 환자'들을 볼 때면 감회가 새롭다. 신기하게도 수녀님을 통해 수술한 아이들은 결과가 좋았다."

―병원에서는 싫어했을 수도 있겠다.

"일요일을 이용했기 때문에 업무에는 영향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수술하거나 치료한 환자들을 계속 추적하며 사후 관리하고, 그 데이터를 축적했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심장병은 수술만으로 끝나지 않고 사후관리가 정말 중요하다. 남들은 봉사하러 다닌다고 했지만, 의사로서도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처음부터 흉부외과를 지원했나.

"아니다. 내가 공부할 때만 해도 외과가 지금처럼 분화돼 있지 않았다. 당시 은사인 홍필훈 교수께서 심장수술을 하기 위해 동물실험실에서 매일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했으면…' 하는 생각에 시작을 했다. 일반외과 출신이다 보니 응급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6개월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간 적이 많다. 당시만 해도 폐 수술이 많았다."

―응급실 당직을 오래 하셨으면 많은 것을 보셨겠다.

"응급실 밑바닥에서부터 일했기 때문에 웬만한 수술은 다 해봤다. 12·12 나던 날 밤에는 총상을 입고 들어온 군 장성을 응급수술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뒤 무엇이 달라졌나.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심장혈관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심장센터를 만드는 것이었고, 1991년 세브란스에 국내 첫 심장혈관센터가 문을 열었다."

―요즘은 외과, 그중에서도 흉부외과의 전공의 지원율이 가장 낮다고 한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무척 어렵다. 흉부외과에 지원한다고 해도 긴 수련기간이 끝나고 나면 교수될 사람 10년에 한 명 건질까 말까다. 결국 이 분야에 일생을 걸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안 된다. 선배들이 좋은 롤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한다."

―자제 중에 의사는 없나.

"둘째 아들이 의사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들이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흉부외과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현재 마취·통증 전문의다"

◇"북한의 심장병 어린이들에게도 눈길을 돌려야"

―설립 28년을 맞은 한국심장재단의 새로운 비전은.

"해외 의료진 지원 확대에 이어 북한 지원 방안을 구상 중이다. 현재 북한은 결핵이나 다른 전염병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데 돈이 많이 드는 심장병 환자를 지원하는 것이 사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도 어떤 방식으로든 지원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북한 상황이 심각한가.

"아무런 데이터가 없다. 하지만 평균 신생아의 0.8~1%는 심장기형으로 태어나는 것을 감안하면 북한 내에도 환자가 많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내 후배 중에도 10년째 북한에 들어가 수술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수술을 해주면서도 그 환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한다. 물어봐도 '알 필요 없시요'하는 식이다."

―재단 내부 분위기는 어떤가.

"이사회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논의할 자문 위원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준비는 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대가 이뤄졌다."

―재단 후원자들은 어떤 분들인가.

"한국심장재단은 재단 기금 수익과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내가 예전에 몰랐던 것이, 재단의 지원을 받은 분 중에 나중에 생활이 나아져서 그것을 갚기 위해 후원금을 내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 작은 정성들이 모여 재단이 운영되고 있다."

―재단에서 또 어떤 일을 준비하고 있나.

"지금까지 지원한 3만명 가까운 환자들의 기록을 근거로 이들의 변화를 추적해서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