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50년대 근대화 보여주는 이한빈 前부총리 육필 사료 기증

지난 18일 오전 서울대 공공리더십개발센터에 한 중년 남성이 커다란 종이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고(故) 이한빈 전 부총리의 아들 이원식(56·전 삼성전자 부사장) 박사였다. 상자를 열자 빛바랜 노트 수십 권이 나왔다. 6·25 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1960년까지 고인이 재무부 예산과장, 예산국장, 차관 등으로 재직하며 국가 살림살이와 근대화에 대해 기록한 육필노트 42권과 당시 정부 문서들이었다. 이 박사는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자료들이 귀하게 쓰일 길을 찾고 있었다"며 "자료를 아버지의 모교인 서울대에 기증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국비 유학으로 하버드대 MBA(경영전문대학원)를 졸업한 이 전 부총리는 1951년 전쟁 중에 귀국, 25세에 예산국 과장이 됐다. 고인은 생전에 자신의 자서전 '일하며 생각하며'에서 "급사와 타이피스트를 제외하면 30명 예산국 직원 중 과장인 내가 제일 막내였다"고 썼을 정도로 이례적 발탁 인사였다.

유족이 기증한 육필노트에는 전후 피폐했던 정부 예산과 미국 원조 내역, 한국은행 차입 내역 등 당시 생생한 정부 살림살이가 담겨 있다. 서울대는 "자유당 시절에는 전산시스템이 없어 모든 관료가 직접 문건을 썼지만,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며 이 자료를 반겼다.

'No.2 (단기) 4287년, 예산'이라고 쓰여 있는 노트에는 전쟁 직후 비정상적으로 커진 국방비가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1955년 전체 국가 예산 902억7900만환 중 군대, 경찰, 퇴역군인 등에 필요한 국방 관련 예산은 전체의 73%인 667억7900만환이었다. 1954년 군대에 김장비로 50만환, 피복비로 160만환을 보낸 내역까지 쓰여 있을 정도였다.

1950년대 중반 노트에는 당시 '원조경제'와 '근대화 노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나왔다. 1953년 긴급부흥사업의 일환으로 미국 등으로부터 철도건설비 5억4999만환, 곡물구입비 533만환, 해저탐사비 3700만환, 통신망구축비 3420만환 등을 지원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에서 기계·엔진·건축자재 구입 등 항목으로 50만불을 지원받은 뒤 공장부지, 시운전 자금, 건축비 등에 지출했다는 내역도 나왔다. 서울대 측은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근대화 노력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1954~1955년 당시 상공부 공업부가 한국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곡식, 고급 공산품, 면화, 청주, 주정 원료(고구마), 해태(김) 등을 구입한 내역과 액수까지 상세히 기록돼 있기도 했다. 1958년에는 반공청년상업자금 5000만환 중 재일교포학도의용단생업자금으로 2000만환을 지급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승만 정부 초기 시절 고인 같은 엘리트 관료 한 사람이 지금 사무관 수십명이 할 일을 도맡아서 했다"며 "전후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지만 고인같이 선진 학문을 익히고 돌아와 조국 근대화에 접목한 행정 관료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전 부총리 유가족은 오는 31일 서울대에 5억2000만원을 기부하는 협약식도 가질 예정이다. 서울대 측은 기증받은 이 전 부총리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기부금은 행정학 관련 사업에 쓸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