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덮친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경제대국들의 동시다발 위기를 빗댄 말)'… 수출·생산·소비 동반 추락

유럽발(發) 쇼크의 실물경제 전염 우려가 현실로 닥치면서 한국 경제에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3일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현재 상황이 외환위기나 리먼 쇼크 직전의 소강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며 "곧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아무리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예견된 것이라 해도 실제 사태가 벌어지면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거라는 말이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됐던 리먼 브러더스 파산도 예견된 일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세계 경제가 안 좋으니까 우리나라도 안 좋다. 청와대까지 '나쁘다'고 하면 경기가 더 가라앉을 수 있어 조심스럽다"며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을 드러냈다.

이번 위기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닥치기도 전에 세계 경제 어느 한 곳 기댈 곳이 없다는 점이다. 수출로 위기를 돌파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엔 미국·유럽은 물론 중국 등 신흥 경제 대국들마저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올 경기를 '상저하고(上低下高)'로 점쳤던 경제 전문가들은 자칫 '상저하저(上低下低)'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기획재정부 내부에선 올해 3.7%로 설정했던 경제성장률도 3.4~3.5%로 낮추는 게 불가피하고, 경우에 따라선 3% 초반까지 내려갈 것으로 각오하고 있다.

◇기업·소비자 모두 어렵다

지난달 31일 대통령 주재 청와대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선 "유로존 위기는 '머들링 스루(muddling through·힘겹게 나아가기)'로 장기화돼 세계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맞을 수 있다. 한국은 금융보다 실물경제 타격이 클 것이다"는 발언이 오갔다.

실물경제 충격은 이미 기업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올 1분기(1~3월) 대부분 기업들의 실적이 부진했다. 영업이익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5.6% 감소했고, 순이익도 9% 줄었다. 가계부채 부담으로 여력이 없는 소비자들은 좀처럼 경제를 견인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말 GDP 대비 민간·정부 부채 총액은 231%에 달해 IMF 외환위기 때의 150%에 비해 100%포인트 가까이 늘어났다. 지난 4월 가계대출 연체율은 0.89%로 작년 12월의 0.67%보다 0.2%포인트 이상 상승했다. 가계대출 부담은 소비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유럽 재정위기와 주가 급락, 부동산 시장 약세 등으로 앞으로 우리나라 민간소비가 둔화될 걸로 예상했다.

◇최대한 상황 지켜보겠다는 정부

내수와 수출이 모두 막히면서 결국 기댈 곳은 정부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 지출이라도 늘려야 심각한 경기 위축을 막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최대한 신중한 입장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상황이 안 좋은 게 확실하지만 얼마나 나빠질지 윤곽이라도 알아야 그에 맞는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며 "현재로선 어떤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통상 6월 초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을 결정해 왔지만, 이번엔 6월 말까지 상황을 지켜본 뒤 대책을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6월 17일 그리스 재총선과 이후 열릴 유럽연합(EU) 정상회담 등을 지켜보겠다는 뜻이다.

정부는 비상대책으로 99조원으로 예정된 올해 정부 기금 사용규모를 1~2조원가량 늘리는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 증액된 돈이 신용보증기금 등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보증 재원으로 사용되면, 그보다 10~20배 많은 자금을 대출할 수 있기 때문에 최대 20조원의 자금이 기업들에 흘러갈 수 있다는 게 정부 계산이다. 예산이 책정됐는데 쓰지 않은 '불용(不用) 예산' 중 절반 정도를 빼내 경기 부양에 쓰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정부가 매년 집행하는 300조원 예산 중 10조원가량이 쓰이지 않고 부채 상환 등에 쓰이는데 이를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론 갈수록 악화되는 경제 상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지적도 많다. 이에 따라 국채를 찍어 자금을 조달하는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추경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28조4000억원 규모로 실시된 바 있다. 하지만 추경을 실시하면 국가부채가 증가해 재정에 부담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재정 건전성 훼손이 불가피하다.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강력한 폭풍)

원래는 둘 이상의 폭풍이 충돌하여 그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커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자연과학 용어다. 지난해 6월 월가(街)의 비관론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2013년에 미국·중국·유럽·일본 등 경제 대국들의 악재가 한꺼번에 뭉쳐 세계 경제를 휘감을 것이라며 이 표현을 써서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