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중의 생로병사] 수명 아무리 늘어나도… 손자까지만 보고 가는 건 마찬가지

서울 성동구에서 건강용품 제조사업을 하는 변경삼씨는 1914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99세다. 그는 그 나이에도 매일 공장으로 출근한다. 새벽녘에 일어나 야산을 한 바퀴 돌고 회사로 향한다. 허리춤에 만보기를 차고 온종일 돌아다니다 1만보가 찍히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변씨는 요즘도 신(新)제품 개발에 몰두해 발명 특허를 낸다. 90세가 넘어서 출원한 발명 특허도 여러 개다. 몸과 머리로 장수를 즐기는 인물이다.

변씨가 유일하게 자동차를 탈 때는 한식이나 추석 때 성묘 가는 길이다. 그때는 50대 손자들이 운전대를 잡는다. 그는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나서 재혼했다. 지금의 아내는 아들 나이뻘이다. 큰아들은 78세고, 막내가 67세다. 큰손자는 56세다. 그렇게 밑으로 내려가 현손자(손자의 손자)는 초등학교 1학년이다. 다섯 세대에 걸친 30여명 가족의 정점에 그가 서 있다.

변씨의 인생은 미래 장수 시대의 삶을 내다보게 한다. 노년의 삶이 자식을 넘어 손자와 맞닿아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한 묶음으로 서로 부양을 주고받는 특이한 관계가 됐다. 일부일처(一夫一妻)제의 삶을 살아왔지만 세월의 종적 개념으로는 다부다처(多夫多妻)의 인생이다. 건강한 초(超)장수인의 삶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가족 형태다.

하지만 5대 가족은 요즘 세상에 매우 특이한 일이다. 변씨가 자식을 낳으면 20대 초반에 무조건 결혼시킨 가풍(家風)을 고집했기에 가능했다. 6년 전 대한의사협회가 5대 가족 찾기 캠페인을 벌여서 전국에서 겨우 26가족을 찾아냈다. 그것도 1세대는 모두 여성이었다. 즉 고조할머니만 있었고, 고조할아버지는 없었다. 5세대가 죄다 딸로만 이어진 모계(母系) 5대 가족도 여섯이나 됐다. 변씨의 5대 가족은 그만큼 희귀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세대 구성은 3대 가족이다. 거주 형태로 보면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3~4인 가족이 가장 많다. 3대가 같이 모여 사는 경우는 전체의 약 2%에 불과하다. 1980년대부터 급속히 핵가족화된 탓이다. 2년 전부터는 1~2인 가족이 3~4인 가족을 앞질렀다. 미혼과 이혼 등으로 가족 구성이 핵분열된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손자까지 보고 세상을 마친다. 증손을 보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조선시대의 평균 수명은 40세 안팎이었다. 비교적 영양 상태가 좋았던 왕들의 평균 수명도 46세 정도였다. 그때도 대개 손자까지 보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0세를 넘겼다. 성인의 최빈(最頻) 사망 나이는 86세다. 유아기와 청소년기의 사망 위험을 비켜가면 거의 90세까지 산다는 얘기다. 인구구조 변화가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선 일본은 이미 최빈 사망 나이가 93세다. 그렇지만 일본도 4대 이상 가족은 매우 드물다. 현대인이 조선시대 사람과 비교해 두 배 이상 긴 삶을 사는데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손자만 보고 세상을 접는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이 통제되기 이전인 20세기 초반까지 인간의 평균수명을 갉아먹는 최대 주범은 높은 영아 사망률이었다. 그때는 자식을 많이 낳는 게 가족의 수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세대의 나이 차는 여성이 수태 능력을 갖출 나이인 18~20년과 같았다. 하지만 요즘 한 세대의 격차는 30년 이상으로 길어졌다. 결혼과 출산 시기가 늦어진 탓이다. 이런 현상은 여성의 사회 진출과 고도산업화로 젊은 세대의 독립생활이 늦어지는 것과 맞물려 있다. 과거에는 의료 수준이 낮아서, 현대에는 삶의 형태가 복잡해져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인생이 손자만 보고 끝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어느 나라나 큰 전쟁이 끝나면 베이비 붐이 온다. 생존의 불안이 다산(多産)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생활이 안정되면 출산율은 감소한다. 쥐를 대상으로 한 수명 연구에서 소식(小食) 훈련으로 수명이 늘어난 쥐들은 자손 번식에 적극적이지 않다. 본래의 짧은 수명을 사는 쥐들은 열심히 교미하여 새끼를 많이 낳는데, '장수 쥐'들은 새끼를 늦게 적게 낳는 경향이 있단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의 세대 지연은 삶의 길이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져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신의 유전자를 8분의 1만 갖게 되는 증손자에 대해서는 생물학적 열망이 시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여성이 폐경으로 생식 능력을 잃고도 30년을 더 사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이 기간은 인생의 후반 3분의 1쯤에 해당한다. 그것을 보면 손자 세대까지가 돌봄과 교감을 공유할 수 있는 최대치인 것 같다.

어찌 됐건 장수사회로 갈수록 길게 늘어지는 3세대의 공존이 불가피하다. 앞으로 세대 간 소통과 통합이 더욱 절실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