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 다른 나] 클래식 古음악 마니아김현철(64) 계명대 의대 교수

아내로부터 안방을 양보받았습니다. 그 방 전체를 음반과 악보로 꽉 채웠지요. LP 4000장, CD 3000장, 클래식 악보 1000권. 오디오 기기를 들여놓은 건 물론입니다. 선을 봐서 결혼한 아내와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점이 통했는데,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다. 당신은 정말 마니아다."

한 달에 음반·악보 구입비로 30만~40만원을 쓰는 저에게 아내는 묻습니다. "당신은 악보랑 음반이 그렇게 많으면서 또 살 게 있소?"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논문 한 편을 쓰면 결론이 나오지만 부족한 것도 눈에 보인다. 그럼 또 공부하지 않나. 그거랑 똑같다. 하나 들어보면 더 좋은 게 있을 것 같고, 그러면 또 사고, 또 사고…."

저는 내과 전문의이면서 대학교수입니다. 1978년부터 계명대 의대에서 일하고 있지요. 전공은 신장학으로 '임상신장학' '신장이식' 등의 책을 냈고 대한이식학회 회장, 대한신장학회 회장, 계명대 의대 학장 등을 지냈습니다.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정회원이기도 합니다. 오전 8시에 출근, 오후 6시 반쯤 퇴근, 1주일에 네 번 진료하고 학생들에게 강의하며 논문 쓰는 생활은 보통 의사와 다를 게 없지요.

저는 의사 일을 하는 동시에 르네상스 음악 전문가로도 활동합니다. 지금까지 쓴 르네상스 음악 관련 책이 모두 네 권입니다. 최근 16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몬테베르디의 예술세계를 다룬 '내가 사랑한 몬테베르디'(2012)를 펴냈고, 그 이전에 '르네상스 음악의 즐거움'(1996),'르네상스 음악으로의 초대'(2007), '르네상스 음악의 명곡·명반'(2007)을 냈습니다.

2004년 '대구악우회(樂友會)'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과 함께 음악 감상을 하고, 2년 전부터는 교회음악 전문 잡지에 매월 고정 기고를 합니다. 대구가톨릭대 음악대학원에서 르네상스 음악 강의도 하고요. 한 해에 연주회 들으러 서울 올라가는 것만 8~10회 정도 됩니다. 베를린필처럼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오면 가족이 몽땅 상경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역시 의사였던 아버지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LP 100여장을 지고 올 정도로 클래식 애호가여서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서울대 음대를 나온 여동생이 피아노 연습할 때 귀동냥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의대 다닐 때는 대구의 유명한 음악감상실인 '하이마트(Heimat)'에서 살다시피 하며 음악을 들었지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모차르트의 선율, '음악의 용광로' 같은 바흐의 깊은 세계에 심취했습니다.

1450년에서 1600년 사이에 발달한 르네상스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입니다. 1988년 미국 코넬대로 유학을 가면서 뉴욕의 중고 레코드 가게를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창고에 음반 수만 장이 쌓여 있는 어느 가게에서 '바흐 이전의 음악'인 르네상스시대의 이상한 음반들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한 장에 1~2 달러 정도밖에 하지 않아 당장 사서 들어보았지요. 플랑드르 지방의 미사곡을 듣고는 단순하고 깨끗한 음색(音色)에 반했습니다. 르네상스 음악은 미사음악이 대부분입니다. 무반주 합창 음악이 많고, 악기를 사용하더라도 류트(lute) 정도지요. 음식으로 치자면 양념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랄까. 단지 '소리'의 아름다움만 느낄 수 있는 그 순수함과 소박함에 빠져들었습니다.

음반을 구하고 음악을 실컷 즐기고 나자 책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첫 책을 쓸 때 국내 자료가 하나도 없어 고생했습니다. 음반에 딸려 있는 설명을 바탕으로 하고, 원서를 구해 보는 등 분투했습니다. 탐구심에 사로잡혀 논문 쓰듯이 책을 쓴 셈입니다. 사실 르네상스 음악을 주제로 책을 쓰는 것도 학자로서 연구하고 논문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논문 주제를 잡을 땐 '남이 하지 않은 것'을 우선으로 잡잖아요. 베토벤이나 바흐에 관한 책과 논문은 1년에 수천 편 나오지만, 르네상스 음악 관련 책은 아무도 안 쓰니까요.

"왜 음악을 좋아하냐"고 주변 사람들이 종종 묻습니다. 음악이야말로 삶의 즐거움이지요. 들을 때마다 행복해지고 위안을 주니까요.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이런 편지를 남겼답니다. "내가 천국에 간다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루터도, 칼뱅도, 아우구스티누스도 아니고 모차르트다." 저 역시 그렇답니다.

그럼 악기 연주는 안 하냐고요? 제가 만일 악기를 다뤘다면 기술 습득에 집중하느라 바빠서 지금처럼 음악을 좋아하게 되긴 힘들었겠지요.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고, 피아노 건반 짚을 줄 아는 게 전부랍니다. 딸아이가 피아노를 꽤 잘 쳤는데도 그 길이 너무 고달프다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음악가가 되길 권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게 제 꿈입니다. 앞으로 음악가 후원도 하고 싶고, 르네상스부터 20세기 종교음악까지 교회음악을 집대성한 책도 준비 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