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조였나… 가계 대출 올 들어 9000억 급감

올 들어 5월 20일까지 은행들의 가계 대출이 급격하게 감소, 9000억원가량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가계 대출이 9조4000억원 늘어났었다.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하지 않는데도 가계 대출이 줄어든 것은 이례적이다.

그 원인으로는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주택담보대출 수요가 줄어든 데다 정부의 가계부채 축소 정책에 편승해 은행들이 대출 문턱을 지나치게 높인 것이 거론된다. 일각에선 유럽 재정위기로 경기 악화를 예상한 개인들이 급격하게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을 시작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내수 둔화가 가파르게 진행돼 불황의 늪으로 빠지게 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900조원을 넘어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으로 불리는 가계 부채가 축소되는 긍정적인 신호인지, 내수의 급격한 둔화를 예고하는 불황의 조짐인지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면서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 "은행 가계대출 급감은 비정상적"

금융감독원은 작년까지만 해도 은행들에 가계대출을 경제성장률 수준으로 줄이라고 강한 행정지도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가계대출이 아예 마이너스로 돌아서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게 된 서민층이 캐피탈, 대부업체로 밀려나면서 금리 부담이 커져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은행들이 너무 심하다. 정부의 방침은 가계 부채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간다는 것이었는데, 무조건 대출을 조이는 것은 비가 오는데 우산을 뺏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감원이 작년 6월 '가계 부채 연착륙 대책'을 내놓고 본격적인 가계 대출 관리에 들어간 뒤 작년 8월부터 가계 대출 증가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6일 금감원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20일까지 금융권의 가계 대출은 1조4000억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은행권(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제외)의 경우 9000억원이 줄었고, 보험사·상호저축은행 등 비(非)은행권은 2조3000억원 늘어났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가계 대출 증가액 17조6000억원(은행권 9조4000억원, 비은행권 8조2000억원)의 8%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급격하게 줄어든 것이다.

◇은행권, "부동산 대출 수요 감소가 주된 원인"

은행들은 "가계 대출을 인위적으로 조이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부동산 경기 침체 장기화로 주택담보대출이 줄어든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A은행 부행장은 "가계대출 잔액 자체가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긴 하다"면서 "(부동산 경기 침체로) 대출 수요 자체가 전반적으로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작년 하반기부터 시중 은행들이 지점별 성과평가(KPI) 항목에서 가계 대출 실적을 제외, 일선 지점에서 가계 대출에 소극적인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B은행 지점장은 "실적평가 항목에서 가계 대출이 빠진 이후 가계대출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점은 있다"고 말했다. 성과평가에서 가계 대출 실적을 제외한 것은 금감원의 가계부채 연착륙 대책의 하나였다.

한국은행이 지난 24일 발표한 '1분기 가계 신용' 자료에 따르면 금융회사(은행권+비은행권)의 가계대출에 신용카드사의 판매신용을 합친 가계부채 잔액은 3월 말 기준으로 911조3624억원으로 작년 말(911조8921억원)보다 5297억원 감소했다. 가계부채가 직전 분기에 비해 줄어든 것은 2009년 1분기 이후 3년 만이다.

◇금감원 지적 후 일주일 만에 은행 가계 대출 1조원 이상 증가

금감원은 지난달 24일 시중은행 부행장들을 소집, "가계 대출이 크게 줄어든 원인을 확인해 보라"고 요청했다. 이 회의 후 불과 일주일 만인 지난달 30일까지 은행권의 가계 대출이 1조원 이상 늘어났다.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들은 그동안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 가계 대출이 줄었다고 했는데 일주일 만에 부동산 경기가 호전됐다는 말이냐"면서 "그동안 가계 대출을 조이고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이사 비수기 등 계절적인 이유 등으로 3월까지 감소세를 보였던 가계 대출이 4월부터 차츰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지난 1분기까지는 은행 가계 대출이 2조원 넘게 감소했다가 지난 5월 금감원 집계에서는 9000억원이 줄어든 것으로 집계된 것을 봐도 차츰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금감원의 상급 기관인 금융위의 입장은 금감원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금감원은 은행 대출이 줄면 서민들이 어려워진다는 데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큰 부작용이 없다면 가계 부채가 축소되는 것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한 관계자는 "금감원이 너무 성급하게 은행들을 닦달했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