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 화가, 이번엔 소설이다

"20여년 전 미국 유학 시절, 한국을 떠나온 그때에 시간이 멈춘 채 '뿌리 없는 식물'처럼 과거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한국에도 미국에도 발붙이지 못한 채 '루저(loser)'의 정서를 지닌 이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관계 맺고, 상처주고, 헤어지는 게 참 서글펐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었어요."

도시의 삶과 풍경을 감성적 색채로 그려온 화가 황주리(55)씨가 소설집 '그리고 사랑은'(예담)을 냈다. 그림 못지않게 글 솜씨도 인정받아온 황씨는 그간 산문집을 네 권 냈다.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사실 내 안에 원래부터 '소설 유전자'가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소설가 지망생이었고, 아버지는 출판사를 경영했죠. 어릴 때부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그가 첫 소설을 쓴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폐 소녀의 내면에 관한 100매짜리 중편을 썼는데, 평소 그의 문재(文才)를 아끼던 불어 교사가 보고선 "넌 소설보다 수필을 써라" 했단다. 이후 아예 손을 뗐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10년부터. 한 웹진에서 연재 요청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 9편은 대개 낯선 이국(異國)에서 정신적 공황상태를 느끼는 인물 이야기를 다뤘다. 이혼과 동거를 일삼는 뉴욕의 여자 회계사와 남자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사랑에 관한 짧은 노래', 뉴질랜드 여행 중에, 먼 옛날 자신이 야멸차게 버린 첫사랑을 추억하는 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키위새가 난다' 등이다. 황씨는 "사랑이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남긴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연애가 끝났을 때 찾아오는 인생이 끝난 것만 같은 기분, 그 적막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묘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 '사랑에 관한 짧은 노래'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끝을 우리는 안다. 텔레비전 정규 방송이 끝난 뒤 빈 화면의 침묵, 그 '지지직'하는 견딜 수 없는 소음, 산다는 일은 어쩌면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황씨는 오는 13~30일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소설 삽화 등 신작 30여점을 선보이는 개인전 '사랑의 풍경'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