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실용의 버무림, 바젤 간다

1~2㎝ 두께로 켠 호두나무 조각이 거대한 고무줄처럼 휘어져 나무 벤치가 됐다. '가구인가 예술작품인가' 고민하게 만드는 이 의자. 디자이너 배세화(32)씨가 만든 2인용 나무 벤치 '스팀_20'이다. 마치 한국의 능선이나 반닫이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극단적으로 전통적이되 모던한 요즘 한국 가구 트렌드가 녹아 있다"는 평을 받으며 국내·외 컬렉터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배씨의 '스팀_20'처럼 한국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국내 대표 가구·공예 디자이너 7명의 작품 38점이 12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디자인 마이애미/바젤 2012'에 선보인다. '디자인 마이애미/바젤'은 2002년부터 매년 12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세계적 디자인 페어인 '디자인 마이애미'의 바젤판. '디자인 마이애미'가 2005년 바젤에 진출해 같은 이름을 달고 매년 6월 여는 전시다.

아트 퍼니처 등 고가의 디자인 작품을 수집하는 디자인 컬렉터들 사이에선 최고의 행사로 꼽힌다. 특히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만드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세계적 명성을 얻는 등용문으로 통한다. 세계 '컬렉터 시장'에서 한국 디자이너들의 '상품 가치'를 검증받는 기회인 셈이다.

이번 '디자인 마이애미/바젤 2012'에선 전 세계 35개 디자인 갤러리가 참여해 17일까지 각국 대표 디자이너들이 수작업한 공예 제품과 한정판 작품을 선보인다. 이 기간, 세계 최대 아트페어인 '바젤아트페어'가 동시에 열려 전 세계 컬렉터들의 관심이 한데 모일 예정이다.

올해 한국 작가들의 주제는 예술성과 실용성 간 조화. 우선 건축적 구성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 눈에 띈다. 도예가 이헌정(45)씨는 콘크리트와 도자를 결합시킨 테이블 '유기적 형태의 콘크리트 테이블'을 선보였다. 테이블 상판에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콘크리트를, 테이블 다리의 한쪽에는 철근을, 다른 쪽에는 도자를 사용해 이질적이지만 빈티지한 조화를 이룬다. 이씨는 2009년 '디자인 마이애미/바젤'에서 톱스타 브래드 피트가 그의 세라믹 테이블을 구입하면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디자이너 김상훈(33)씨의 높이 1.6m짜리 가림막 '현상(Phenomena)'도 건축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김씨는 개방감과 폐쇄성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나무를 가로로 길게 잘라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나무를 쌓아올린 틈으로 빛과 바람을 통하게 하고, 적당한 프라이버시도 지키겠다는 것. 이씨는 "많은 사람들이 공간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인지하고 경험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며 "빛의 움직임만으로 가구가 율동감을 갖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했다"고 했다.

천연소재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 한국적 자연주의를 달성한 작품도 눈여겨볼 만하다. 디자이너 강명선(38)씨의 벽걸이 수납장 '빛으로부터(From the glitter)'는 한국 전통 공예 소재인 자개의 풍부하고 은은한 색감을 현대적으로 되살렸다. 나전기법과 옻칠을 사용했지만 내부 수납칸을 가로·세로로 자유롭게 배열하거나 분리해 설치할 수 있어 기능적이다. 디자이너 박종선(43)씨의 책상 '트랜스 2012'는 흰 떡갈나무와 얼룩말나무 등의 결을 살려 만들었다. 상판의 가장자리 삼면을 트고 서랍은 상판 홈을 따라 좁게 설치해 군더더기를 없앴다.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검박한 조선시대 남자들의 공간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30~40대 디자이너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안정적으로 받쳐줄 학계의 두 중견 디자이너 작품도 선보인다. 최병훈(60) 홍익대 교수의 벤치형 의자 '잔상(afterimage)'은 돌을 부드럽고 매끌매끌하게 연마해 만든 극단적으로 단순한 의자. 그가 만들어 덕수궁 돌담길에 놓여진 낮고 매끈한 돌의자들을 떠올리면 어떤 작품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장진(62) 경희대 교수의 도자기 작품은 따스하고 소박한 전통 한국 도자공예의 아름다움을 꾸밈없이 담백한 미니멀리즘의 시선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