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냉소·위악의 틀을 깨다

예술가는 ‘패턴’을 혐오한다. 여기서 패턴은 틀, 통념, 선입관, 혹은 반복적 일상의 동의어. 작가 은희경은 냉소(冷笑)와 위악(僞惡)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바로 그 냉소와 위악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패턴이 신물 났다. 새 장편 ‘태연한 인생’(창비)은 그 강압적 패턴에 대한 은희경식 탈출이자 거부다.

“내가 뭘 새로운 걸 한다고 시도해도, 사람들은 다 기존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제발 옆 모습 좀 봐달라고 썼는데, 항상 정면만 바라본다니까. 그 패턴을 벗어나 보고 싶었어요. 글에서나 삶에서나. 우리 인간은 모두 고유성이 있는 존재니까.”

‘태연한 인생’은 서사(敍事)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 독서의 매력은 캐릭터에 대한 자발적 감정이입. 분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거나, 자신도 모르게 킥킥대거나, 계면쩍어 코를 흥흥거리거나, 가슴 아래께가 뻐근해지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입의 첫 번째 대상은 시니컬하고 한심한 소설가 요셉. 한때는 주목받는 작가였으나 이제는 청탁하는 출판사도 거의 없고 하루하루를 탕진하는 퇴락한 인생이다. 물론 말로는 그 역시 패턴을 거부하는 예술가. “시간이 되면 꺼지는 기계처럼, 고유함이 없다면 인간은 패턴에 의해 소비될 뿐이다” “어떤 패턴으로도 정형화할 수 없는 관계에서 호기심과 에너지를 얻곤 했다. 그래서 연애에 매혹되는 것이다”라고 현학적 궤변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실제 삶은 속물근성과 이중성의 전형적 캐릭터. 영화에 비유하자면 홍상수 감독 작품에 등장하는 한심한 지식인 속물들과 오와 열을 맞춰 앞으로 앞으로 행진시킬 수 있는 그런 존재다.

두 번째 감정이입 대상과 연결되면서 ‘태연한 인생’은 보다 풍성해진다. 그녀의 이름은 류. 어머니는 비행기를 타다가 흐름(流)이라 생각하고 지었다고 했고, 아버지는 ‘울지마라, 류’라는 오페라 아리아에서 가져온 이름이라 했다. 비행기와 오페라, 이성적 논리와 감정적 매혹, 아니면 두 꼭짓점 사이의 어딘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던 대학생 시절 어머니에게 반해 집요한 구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한 아버지지만, 충동적 성격의 소유자답게 결혼하자마자 다른 매혹의 대상을 찾아다닌다. 함께 있으면 고통이고, 혼자 있으면 고독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제 자신을 ‘배우’로 탈바꿈시킨 뒤 홀로 고통과 고독을 통과한다. 류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결실이었다. 이 몰인정한 작가는 이제 요셉과 류에게 로맨스를 선물한다. 패턴을 거부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패턴에 굴복 중인 추접스러운 소설가와, 비행기 구름 너머 서정적인 아리아로 패턴을 훌쩍 뛰어넘는 여인의 연애에서 누가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을 것인가. 그 연애의 최종 풍경은 어떤 빛깔과 무늬를 띠고 있을 것인가.

큰 기둥 줄거리는 이렇듯 요셉과 류의 로맨스지만, ‘태연한 인생’은 텍스트와 작가 그리고 읽는 독자까지 시종일관 포개지고 갈라지면서 독서의 즐거움을 입체적으로 선물한다.

원래 작가 은희경이 가장 꺼리는 플롯은 소설가가 주인공인 이야기라고 했다. 게다가 글이 안 써져서 무작정 여행을 떠난 작가가 우연히 현지 포장마차에서 누군가를 만나 소주 마시며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최악이다. 작가는 ‘태연한 인생’에서 바로 그 피하려던 패턴까지도 에피소드로 등장시키며,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를 조롱하고, 역설적으로 패턴 탈출을 시도한다.

사실 패턴에 따르기만 하면 인생은 편안하다. 기승전결로 끝나는 해피엔딩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법이니까.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 하지만 그 안에서 개인의 고통과 슬픔과 고독은 저당잡힌 것이 아닐까. ‘태연한 인생’이 아니라 사실은 ‘태연한 척하는 인생’들에게, 작가는 묻는다. 정말 잘살고 있느냐고. 쓰라리지만 꽤 유머러스한 인생과 연애의 예방주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