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우 교수의 경영 수필] 고려청자로 韓기업 잠재력 보여줘… 때론 문화재도 근사한 마케팅 수단

"어젯밤 늦게까지 우리 집사람한테서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박물관에서 본 한국의 문화유산이 매우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고 하던데, 오늘 공장 방문 일정 후에 우리 남자들도 박물관에 좀 가볼 수 있나요?"

필자가 삼성전자 미국법인에 근무하던 시절, 미국 전자업계의 리더들을 초청해 함께 한국 본사를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IMF 사태가 터진 지 1년 후여서 요즘처럼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지 않았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저가(低價)제품 수출이 주류를 이룰 때였기 때문에 해외 구매담당자의 방한(訪韓)은 잦았지만 외국의 유력 기업인들을 초대하기도 쉽지 않았고, 설사 온다고 하더라도 여러 날을 붙잡아 두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해외 유통업체의 최고 경영자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우리의 비전과 회사의 잠재력을 보여주기 위해 'Explore Samsung! Korea Tour(삼성 재발견 한국 여행)'를 기획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우리가 제시했던 일정 중에 국립박물관, 호암미술관 등의 일정은 빼고 공장과 신제품만 보겠다며 기업 방문 일정을 최소한으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래도 필자는 이들에게 공장 시설과 개발 중인 제품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선조의 지혜가 깃든 문화 유산을 통해 우리의 가능성도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 언젠가 국보 133호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磁辰砂蓮華文瓢形注子)' 복제품을 받고 감탄하던 거래처 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낸 아이디어가 부부 동반으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부인과 같이 여행을 오게 하면 아무래도 좀 더 여유 있게 머물 수 있어 우리와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남편들이 회사를 방문하는 동안 부인들에게 우리 문화유산들을 접하게 해주면 그런 경험이 언젠가 남편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다행히 전날 박물관을 방문했던 부인들의 반응이 좋았다. 부인들로부터 한국의 우수한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남편들은 일정을 바꾸어 자기들도 박물관에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닌가.

◇선조들의 지혜 담긴 도자기·민속품은 한국 제품의 잠재역량

서울에서 해외로 출장을 갈 때나, 해외 주재 중에 서울로 출장 왔다가 돌아갈 때 언제부터인가 필자의 손에는 항상 도자기나 민속품이 들려 있었다. 해외 거래처들에게 의례적으로 건네는 인삼제품이나 술 한 병보다는 비록 복제품이었지만 정성스레 가슴에 안고 간 고려청자나 기마상 토기를 모두들 더 고맙게 여겼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그들에게 우리의 문화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마냥 자랑스러웠다.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설명해 주다가 필자 자신도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선조들의 지혜를 깨친 것은 큰 축복이었다.

한동안 필자에겐 '남의 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였던 게 사실이다. 우리 것보다 서양의 대규모 석조 건물과 이국적인 풍경의 미술과 조각품을 보면서 서양의 문화를 동경했다. 꽤 여러 해 해외 생활을 한 뒤에야 고려청자의 조형미와 색깔의 우아함에 더해 상감(象嵌)과 진사(辰砂)기법이 당시로는 얼마나 하이테크(high-tech)였던 것인지, 한옥의 아름다움 뒤에 얼마나 많은 삶의 지혜와 과학이 곁들여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필자는 거래처들에게 줄 제대로 된 선물을 사러 다니면서 우리의 민예품이나 국보급 유물의 복제품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 선물들의 가치를 제대로 설명해 주기 위해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준비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필자는 한국적 조형미뿐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생활의 지혜와 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선조들의 디자인 역량과 기술을 우리가 만들 제품의 우수함과 연결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은 영국의 투자자에게 오백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선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소. 산업화는 늦었지만 우리의 잠재 역량은 그대로 있소"라며 우리가 좋은 배를 만들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설득하지 않았던가?

◇우수한 문화자산을 강력한 마케팅 수단으로

'삼성 재발견 한국 여행'에 참가했던 12명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미국으로 돌아가서 입소문(Word of Mouth)을 내기 시작했다. "한국 방문을 통해 삼성의 진면목을 본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삼성은 한국이 가지고 있는 오랜 역사와 문화에 깃들여진 '창조의 DNA'를 큰 자산으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강자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성은 더 이상 '다크호스(눈여겨 보아야 할 우승 후보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베팅해야 할 우승후보'이다." 이런 입소문은 한국 제품에 대한 미국 업계의 인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들은 방한 기간 중 여러 박물관과 고궁에서 직접 보고 들은 한국의 독창적인 문화유산을 통해 우리의 창조적 역량과 가능성을 본 것이다.

오늘날 기업들의 '문화마케팅'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문화마케팅이란 문화나 예술을 지원하는 '메세나(Mecenat)' 활동뿐만 아니라 문화 콘텐츠를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와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브랜드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고객에게 제공되는 감성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마케팅을 말한다. 크고 작은 많은 기업들이 메세나 정신을 실현하고 있는데, 우리의 높아진 국격과 성숙한 기업정신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와 더불어 글로벌 경쟁에서 우리 브랜드의 위상을 높이고 더 큰 성과를 내기 위해 우리 문화를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됐다. 우수한 문화자산을 우리의 잠재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강력한 스토리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내실 있는 문화 마케팅이 아닐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