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개전 쓰던 남편, 요 위에 엎드려 쓱쓱"

보통 펜보다 두세 배 굵직한 만년필, 원고지에 시원시원하게 써내려간 육필원고, 가로 74㎝, 세로 31㎝짜리 자그마한 집필용 서안(書案), 문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40대 이상이면 대부분 읽었을 명랑소설 '얄개전' 작가 조흔파(1918~1980) 선생의 유품 300여점을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 만날 수 있게 됐다. 조흔파 선생의 부인인 수필가 정명숙(80)씨가 최근 도서관에 남편 유품들을 기증한 덕이다.

"결혼(1954년) 때 남편이 커다란 요 한 채만 해오라고 하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분이 안방에 요를 깔아놓고 큰 대자로 엎드려 글을 쓰는 게 습관이었습니다. 양팔과 다리, 가슴 아래에 베개 5개를 받치고 만년필로 쓱쓱 원고를 써내려갔어요."

13일 만난 정씨는 50여년 전 남편이 '얄개전'을 쓰던 당시를 어젯밤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렸다. 얄개 '나두수'가 탄생한 것도 정씨가 혼수로 준비한 요 위에서였다. 1954~1955년 잡지 '학원'에 연재한 '얄개전'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청소년들의 유머 감각을 되찾아준 히트작이었다. 잡지 연재에 이어 소설, 만화로도 나왔고, 1970년대엔 석래명 감독의 '고교 얄개' '얄개행진곡' 등으로 영화화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얄개는 조흔파 부부에게도 구세주였다. 정씨는 "그때 받은 원고료로 결혼 직전 대학(숙명여대) 등록금을 내고 화신백화점에서 한복을 최고급으로 맞춰 입고 결혼식을 올렸을 정도니까요"라고 했다.

당대 최고 고료를 자랑하던 인기 작가이다 보니 그의 집엔 늘 가난한 문인들이 들락거렸다. 아내 정씨는 문인들 뒤치다꺼리하다 수필가로 등단했다. 이번에 기증한 유품 중엔 두툼한 만년필이 눈에 띈다. "남편이 워터맨 만년필을 썼는데, 소매치기당했어요. 다음 날 종로 파랑새다방에 갔더니 정비석 선생이 그 만년필을 갖고 있더래요. 소매치기가 훔친 뒤 그 가게에 팔았던 모양입니다. 화가 난 남편이 수제(手製) 만년필을 주문제작한 게 바로 이겁니다. 한 번 잉크를 넣으면 400자 원고지 100장은 거뜬히 쓸 만큼 잉크가 많이 들어갔어요."

기증 목록엔 1952년 6·25전쟁 당시 쓴 수필 '상모곡(想母曲)'부터 타계 열흘 전인 1980년 12월 15일에 쓴 마지막 원고 '달력'까지 고인의 육필원고 30여점이 포함돼 있다. '어머니가 사준 가방 한 개만 들고 사경을 돌파하여 한강을 건넜다'고 쓴 '상모곡'엔 전쟁통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는 아들의 애끊는 정이 담겼다. 평양 출신인 조흔파는 6·25 발발 전 가족을 북한에 두고 서울에서 중앙방송 아나운서, 경기여고 교감서리 등으로 일했다. 4·19 전후엔 국무원 공보국장, 중앙방송국장을 맡았다.

정명숙씨는 조흔파 선생 타계 후 30여년간 서울 불광동, 목동, 경기도 일산 등으로 이사 다니면서 남편 유품을 갖고 다녔다. 2010년 서울 등촌동 실버타운에 들어가면서도 공동지하실에 박스 10개 분량을 보관했다. 그러다 작년 신문기사를 읽곤 마음을 굳혔다. "조선일보에서 마해송 선생 책과 자료를 도서관에 기증했다는 기사를 읽고, 이거다 싶었습니다. 도서관에 두면 남편 작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볼 수 있잖습니까. 이젠 속이 후련해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엔 아동문학가 강소천·박홍근·윤석중·마해송의 육필 원고 등을 보관하는 개인문고가 설치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