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脫농경사회'에 걸맞은 음주문화

도쿄특파원 시절에 만난 일본 대기업의 한 임원은 한국 출장이 무섭다고 말했다. 그는 “전임자가 한국 측 파트너회사 임원들과 어울리면서 폭탄주와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를 견디지 못해 그만뒀다”면서 “일본에선 술이 세다는 평을 듣는 나도 서울에 갈 때마다 술자리를 어떻게 모면할까 잠을 설칠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특파원을 지낸 일본 신문의 여기자는 칼럼을 통해 ‘한국에는 폭탄주라는 위험한 술이 있다. 10잔을 마시고 기억을 잃었다. 무섭다. (한국에선) 폭탄주를 마셔야 한다는 의무감이 직원들의 무의식의 영역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비꼰 적이 있다. 일본 언론에 한국의 ‘폭탄주’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지만, 일본 상사원들이나 한국 주재원들에게 ‘폭탄주’는 여전히 ‘경계대상 1호’로 꼽힌다. 한일 국교정상화로 양국 교류가 시작된 1965년부터 1997년까지 수많은 일본 기업이 한국에 진출했지만 주재원 가운데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국의 난폭한 술문화를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한국인과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서울에 온 프랑스인 주부 A씨는 “어느 날 남편이 술에 취해 두 다리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네발로 기어 들어오더라. 남편의 처음 보는 그런 모습이 너무 무섭고 부끄러워 일주일 동안 바깥 출입을 못했다”고 말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시집온 외국인 신부들이 ‘주폭(酒暴)’ 남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귀국하는 사례가 빈발해 한국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나라들에서 한국은 ‘남편이 매일 술을 마시고 아내를 때리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다.

본지 취재팀이 지난 보름간 우리의 뒤틀린 음주문화를 점검하기 위해 ‘술 권하는 사회, 범죄 키우는 한국’을 기획연재하는 동안 독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거듭 확인한 사실은 주폭들이 활개쳐도 국가 공권력이 방치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독자가 지적한 대로 ‘술로 인간관계를 맺고 술로 일하려는 비겁한 음주문화’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기현상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라를 대표하는 한 인사는 외국인들 앞에서 “나의 특기는 폭탄주 제조”라고 말하는가 하면, 두주불사(斗酒不辭)가 여전히 리더의 미덕인 양 칭송받고 있다.

지도층의 인식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는 공공장소에서 만취(滿醉)한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범죄로 여기지도 않는다. 현행 경범죄 처벌법에선 공공질서와 사회안녕을 위해 54가지의 행태를 금지하고 있는데, ‘술’과 관련한 항목은 없다. 하지만 외국은 타인이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음주보행조차 범죄로 취급하는 나라가 수두룩하다. 우리도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다니는 것조차 법으로 금해야 한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형을 가볍게 받는 법원의 판결 관행도 폐지해야 한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성범죄의 경우 주취(酒醉) 상태를 감형 요소에서 제외하기로 했지만, 다른 범죄에선 여전히 술김에 한 행동은 형을 줄여주고 있다. 일부 변호사들은 의뢰인에게 무조건 술을 마셨다고 진술하라고 부추기는 실정이다.

며칠 전 서울의 한 법원에서 술에 취해 택시기사를 폭행한 피고인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농경사회에서 형성된 음주문화가 탈농경사회에서 계속 유지될 수 없으며, 탈농경사회에 부합하는 음주문화와 규범이 요구된다”고 훈계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 수없이 경험한 대로 음주문화를 바꾸자는 캠페인은 별로 소용이 없었다. 결국 법을 집행하는 현장에서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