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패션쇼… '예술의 성지', 내부서 첫 패션쇼를 許하다

보슬비가 살포시 내리던 12일 저녁 8시 30분(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빗소리를 타고 경쾌한 음악이 박물관의 정적을 깼다. 일자로 도열한 강렬한 조명 불빛이 어스름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잠든 루브르'를 깨운 진원지는 디귿(ㄷ)자 형태로 된 루브르 박물관의 남쪽 날개 부분 '드농(Denon)관'의 1층 회랑(回廊)이었다. 아치형 천장 아래 긴 복도를 따라 설치된 140m 초대형 패션쇼 런웨이 위로 모델 40명이 역동적으로 오갔다. 바로 옆, 건축가 아이엠페이의 역작인 유리 피라미드 아래는 눈 결정체 모양의 조명 쇼와 함께 패션쇼를 기념하는 파티장으로 깜짝 변신했다.

'예술의 성지'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사상 처음으로 건물 내부를 패션쇼 런웨이에 내줬다. 지금까지는 루브르 바깥 정원에서 박물관과 유리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패션쇼가 열렸을 뿐이다. 역사적 이벤트의 주인공은 프랑스 브랜드가 아닌 이탈리아 명품 패션 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였다. 페라가모사(社)는 이날 루브르 드농관에서 '2013 봄·여름 리조트 패션쇼'를 열었다.

루브르가 굳게 닫혔던 박물관 내부를 패션업체, 그것도 이탈리아 회사에 이례적으로 개방한 배경은 전시회 후원이었다. 페라가모는 이탈리아 출신의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명작 '성 모자(母子)와 성 안나'의 복원을 기념해 현재 루브르에서 열리고 있는 '성 안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고 걸작' 전시를 후원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루브르가 내부를 개방한 것. 페라가모사의 페루치오 페라가모 회장은 "이탈리아의 스타일과 역사를 루브르라는 특별한 장소에, 역사상 최초로 가져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이날 쇼에선 '박물관 회랑'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이 빚어낸 극적인 무대 연출이 돋보였다. 일반적인 패션쇼 런웨이는 25~30m. 이번 쇼의 런웨이 길이는 이보다 5배 정도나 긴 140m였다. 모델이 왕복 280m를 오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회랑을 따라 높다랗게 세워진 열주(列柱)의 '수직적인 흐름'과 기다란 런웨이의 '수평적인 흐름'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다.

"축구장 가로 길이가 120m다. 모델들이 하이힐을 신고 축구장보다 긴 곳을 왔다갔다하는 거다. 그만큼 우리 신발이 편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닌가.(웃음)" 현장에서 만난 미켈레 노르사 페라가모 대표이사는 축구광인 이탈리아인답게 런웨이를 축구장에 비유하며 무대의 특별함을 설명했다. 무대 디자인을 맡은 디자이너 세르지오 살레르니는 "루브르 박물관이 역사적인 건물이라 무대 연출에 제약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벽에 스피커나 조명을 부착할 수 없어 유리로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조명을 설치하고, 스피커는 관람객이 앉는 벤치 뒤로 숨겨 지면 위에 두는 기지를 발휘했다.

런웨이에 올려진 옷은 '루브르와의 조화'에 방점이 찍힌 듯했다. 살구색·옅은 복숭아색·사막의 모래색 등 스킨톤에 가까운 중간 색조의 옷이 박물관 내벽을 이루는 석회암의 부드러운 빛깔을 배경으로 조화를 이뤘다. 또 다른 축은 '이탈리아 정교한 장인(匠人) 정신'. 부드러운 나파가죽(양가죽의 일종)과 뱀피를 엮어 짠 니트, 프린지(술 장식)와 정교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티셔츠 등 섬세한 손기술을 보여주는 의상이 많았다.

의상을 총괄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씨밀리아노 지오르네티는 "루브르라는 장소가 가진 아름다움과 관련해서 무언가를 억지로 만들어 내고 싶진 않았다"며 "대신 '예술의 성전'으로 불리는 루브르에 이탈리아 패션에 깃든 장인정신(craftsmanship)을 가지고 오는 것이 목표였다"고 했다.

노르사 대표는 "현재 이탈리아에 있어 '패션'은 과거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에 상응한다. 색채와 구조, 장인정신이 접목됐다는 점, 이미지로 대중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며 이번 쇼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과거와 현재, 패션과 예술의 교직(交織) 속에 루브르의 밤은 풍요롭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