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칼럼] '묻어둔 돈' 굴려야 경제가 굴러간다

얼마 전 어느 한국 회사가 미국 회사의 아시아 지역 사업을 인수했다. 인수 계약이 발표되자 곧바로 한국 기업을 찾아온 손님은 싱가포르 공무원이었다. 그는 지금 홍콩에 있는 미국 회사의 아시아 지역 본부를 싱가포르로 옮기라고 권했다. 세금 감면 같은 혜택을 제공하겠다는 유혹도 덧붙였다. 이 한국 회사 경영진은 "더 잘 해주겠다는 나라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한국 공무원은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을 것이다. 우리 공무원들은 비싼 출장비를 써가며 외국 기업을 유치하겠다고 해외를 싸돌아다닐망정 외국 회사를 인수한 한국 기업인에게 본부를 서울로 이전하라고 권하며 뛰어다니지 않는다. 외국 기업의 경영진을 만나려고 먼 길을 달려가면서도 국내 기업인 앞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는 게 한국 공무원이다.

경제 성장 50년의 역사는 한국에 많은 유산을 남겨놓았다. 세계시장을 호령하는 기업이 나타났고, 외국에서 알아주는 인물도 등장했다. 머리 좋은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신기술은 적지 않게 쌓여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좋은 자원과 잠재력을 풀가동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 유보금이다. 10대 그룹의 사내 유보금은 340조원에 달한다. 경영 위기 때 사용하거나 장차 새로운 사업에 지출할 여윳돈이 그렇게 많다. 국내 기업의 유보금은 10년 이상 줄곧 늘어왔다. 무차입(無借入) 경영을 하는 회사도 여럿 나타났다. 우리 기업 중에는 묻어둔 돈을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아 머리를 싸매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그들은 모처럼 투자하려고 결심해도 한국 땅을 피해 외국에 공장을 짓는 쪽을 선택한다.

나라 경제의 한쪽에는 잉여 자금이 쌓여있는데도 다른 쪽은 황무지 상태다. 지방 공단에는 잡초가 우거진 지 오래됐다. 경제자유지역 공무원들은 입주할 기업이 오지 않는다고 체념하는 분위기다. 이쪽에서 남아 넘치는 돈을 끌어다 저쪽 빈터에 채워볼 궁리를 하지 않는다. 경제자유지역의 빈터는 그대로 둬봤자 돈이 생기고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땅값이 올라 훗날 부동산 차익이 돌아올 일도 없을 것이다. 텅 빈 공간을 유지하려고 공무원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조직을 가동하는 데 하염없이 비용만 들어갈 뿐이다. 그런데도 국내 기업에는 외국처럼 공짜나 반값으로 공장 터를 제공하려 들지 않는다.

국내 기업에 색다른 혜택을 제공하면 유독 특혜 시비가 많은 나라이긴 하다. 하지만 쌓여가는 유보금을 보면서도 한국 회사들이 해외로 달려나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때는 지났다. 미국·일본에서는 유보금이 많은 회사에 세금을 더 물리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우리도 유보금을 장기간 쌓아두는 회사에는 별도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해야겠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국내 기업이 우리 땅 안에 투자해 일자리를 만들도록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경제의 지하에 묻혀있는 또 다른 매장물(埋葬物)은 국유재산이다. 우리는 국가 부채가 744조원이나 된다고 걱정하면서도 863조원에 달하는 국유재산은 챙기지 않는다. 국가가 갖고 있는 땅만 해도 433조원어치다. 국유재산을 팔겠다면 국민 정서상 거부감이 없지 않고, 심지어 매국노(賣國奴)로 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는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끝에 항만과 공항, 관광지 같은 국유재산을 팔겠다고 내놨다. 막다른 벼랑에 몰린 나라의 부동산은 잘 팔리지도 않고, 잘해야 가격 후려치기의 대상이 되고 만다. 평상시 국유재산을 적절히 정리해 국가 부채를 줄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요즘 그리스가 보여주고 있다.

국유재산 중에는 국보(國寶)처럼 팔아서는 안 되는 것도 있지만 굳이 국가가 갖고 있을 필요가 없는 평범한 토지나 건물이 적지 않다.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때 하나둘씩 정리하면 나랏빚을 줄이면서 복지 재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8년 외환보유액을 2400억달러나 쌓아두고서도 달러화가 없어 외환 위기를 겪었다. 지금도 외환보유액이 3100억달러에 달하지만 언제 다시 위기가 닥칠지 몰라 국민은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비상금을 제때에 꺼내 쓸 수 있도록 해놓지 못한 채 그저 금액만 늘려놓는다고 위기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곧 인구는 줄어들기 시작하고, 고령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묻혀있는 국가 자산을 전면 가동해야 성장 엔진이 꺼지지 않는다. 그저 쌓아두기만 하는 국가 경영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