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지점 5년째 제자리(7500여개)… 장기 저성장 신호인가

서울 대치동 도곡역 네거리. 자산가가 많이 사는 이 동네엔 블록마다 은행 지점이 들어차 있다. 같은 신한은행 대치동센트레빌 지점과 도곡역 지점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동네에서 서로 경쟁하는 처지다. 최근 새로 지점을 낸 산업은행은 상가 1~2층 자리를 찾지 못해 5층에 자리 잡았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2008년 이후에는 새로 개발되는 신도시 지역 외에는 새 지점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돈 냄새를 맡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가진 은행이 더 이상 새 지점 자리를 못 찾을 정도라는 것은 국내 금융시장이 포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방증한다. 나아가 한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 시대를 맞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은행 지점 수, 실물경제 바로미터

은행 지점 숫자는 경제성장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보여 왔다. 그런데 이 숫자가 5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2008년 7500개에 도달한 은행 지점은 이후 7379개(2009년)→7465개(2010년)→7574개(2011년)로 7500개 안팎을 맴돌고 있다.

외환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경제성장률이 10.7%에 달한 1999년에는 한 해 동안 1200개가 넘는 지점이 생겼다. 성장률이 7.2%였던 2002년의 지점 증가율은 3.9%였는데, 그 이듬해 성장률이 2.8%로 뚝 떨어지자 지점 증가율도 따라서 1.1%로 둔화됐다.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2009년 경제성장률이 0.3%로 제자리걸음을 하자 은행들은 전국적으로 121개 지점을 없앴다.

◇과도한 지점망, 고비용 구조

은행이 예전처럼 계속 고수익을 낼 수만 있다면 경비가 들더라도 지점 수를 늘려 경쟁자들과 양적 경쟁을 계속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성장이 정체되면서 비용 절감이 경쟁의 포인트로 부상하자 은행들은 지금처럼 많은 지점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이 합당한지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지점 운영 비용이 은행 지출의 40~50%를 차지하기 때문에 지점이 많을수록 고비용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A은행 내부 자료에 따르면, 서울 강남 지역에 지점 한 곳을 개설하는 비용(임대 보증금과 시설 공사비)이 31억1000만원에 이르고, 연간 운영비(인건비와 임대료)는 따로 8억2000만원이 든다. 이 정도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예금을 1660억원 이상 유치해야 한다는 게 A은행의 판단이다.

은행이 지점의 존재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 데는 새로운 고객 접촉 창구인 인터넷뱅킹의 확산도 일조했다. 지난해 은행권에서 이뤄진 금융거래 중 인터넷뱅킹 거래가 37%에 이르는 반면, 지점 창구 거래는 12%에 불과했다.

한국의 경제 규모에 비해 은행 지점 수가 너무 많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한국의 GDP(국내총생산)는 일본의 5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은행 지점은 우리나라가 일본(2111개)의 3.5배 수준이다. 영국은 GDP가 우리나라의 2.1배인데 은행 지점은 9550개로 우리나라의 1.2배에 불과하다.

◇선진국, 은행 지점 줄이는 추세

미국과 영국의 대형 은행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지점망을 축소하고 있다. 미국은 2008년에 은행 지점 수가 9만9161개까지 늘어났다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로는 매년 1000개가량 줄고 있다. BoA(뱅크오브아메리카)는 올 1분기에만 154개 지점을 폐쇄했다. 최근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9550개가량인 영국의 은행 지점이 2018년까지 8000개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은행도 이런 추세를 따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대형 은행마다 지점장만 1000명에 이르는 인력 구조를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지점망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는 은행 지점이 주변 상권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은행 지점망 축소가 지역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고객들이 은행을 오가면서 인근에서 갖가지 경제활동을 하는데, '심장'이 사라지면 주변에 돈이 돌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또 빌딩 주인들이 은행과 같은 안정적인 세입자를 잃게 되면 부동산 시장에 악재가 될 것이란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