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흔적을 캐던 그녀… '장르'를 발견하다

"모처럼 보는 정통 장르 드라마의 출현" "미드(미국 드라마)와 견줘도 손색없는 작품." SBS 수목드라마 '유령'의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반응들이다.

'유령'은 사이버 범죄 수사관과 해커(컴퓨터 통신망 따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컴퓨터에 무단 침입해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없애거나 망치는 사람)의 두뇌싸움, 법의 그물망을 조롱하는 대기업 얘기를 그리는 묵직한 드라마다. 이 작품을 쓰는 사람은 마흔살의 작가 김은희. 그는 앞서 지난해에는 SBS 드라마 '싸인'을 통해 시체를 해부하며 사인(死因)을 밝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법의관 얘기를 다뤘다.

평론가들은 그에 대해 "그동안 보기 드물었던, '본격 장르 드라마'를 고집하는 작가"라고 한다. 실제 그의 작품에는 연애·불륜·치정·출생의 비밀 같은,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 장치들이 없다. 사건의 시작과 끝을 파헤치는 데만 집중한다. 13일 김 작가를 전화로 만났다. 그는 "매일 대본을 쓰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고 했다.

―'싸인'에 이어 '유령'도 정통 수사물이다.

"내가 시청자 입장에서 보고 싶은 드라마를 쓰다 보니, 결국 또 수사물을 쓰고 있더라. 취재부터 집필까지 쉽지 않아서, 속으론 후회 막심이다(웃음). 외국 드라마처럼 촘촘한 장르 드라마를 구축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사람이 남긴 흔적에도 관심이 많다.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은연중 계속 거짓말을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미화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시체가 대표적이다. 시신을 해부해 보면 그 사람이 죽기 직전 상황을 알 수 있다. 사이버 세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머릿속을 알고 싶으면 그가 쓴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살피면 된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취재가 쉽지 않았겠다.

"'싸인' 땐 '최신 법의학'이란 책을 통째로 읽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유령'은 그것조차 만만하지 않았다. 서점에 깔린 전문서적의 양이 엄청난 데다, 다 읽는다 해도 내가 그 분야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경찰청 사이버수사대 분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며 취재를 했고, 함께 엠티도 갔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분들에게 어떤 디테일을 넣어야 하는지 묻는 식으로 대본을 메워나갔다."

―어려운 걸 쓴다고 말리는 사람은 없었나.

"대부분이 말렸다, 그런 전문적인 얘기를 누가 보겠느냐고(웃음). 게다가 사이버 수사는 컴퓨터 앞에서 앉아서 하는 건데, 그게 그림이 되겠느냐고.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오히려 도전의식이 생기더라."

―'싸인' 땐 남편 장항준 감독과 함께 대본을 썼지만 이번엔 혼자 쓰는데.

"내 상상력과 의지대로 이야기를 엮을 수 있다는 건 장점, 그만큼 책임감이 크고 망하면 온전히 내 탓이라는 건 단점이다(웃음)."

―쓰면서 가장 고생한 장면은.

"극 중 해커 박기영(최다니엘)이 수술을 거쳐 김우현 경위(소지섭)로 변신하는 장면. 현실에선 실현되기 어려운 얘기인 만큼 자연스럽게 보여줘야 했다. 제작진끼리 '박기영 역에 소지섭과 비슷하게 생긴 유승호를 섭외해야 하나' 하고 농담도 했다."

―극 중 여배우를 죽인 범인이 대형 증권사 대표로 나온다.

"자본의 공포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현실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무엇인지, 자본은 대체 어디까지 우리를 조종할 수 있는지를."

―유강미 경위로 출연하는 이연희의 연기력에 대해 논란도 일고 있다.

"드라마 속 유강미는 원래 경찰 같지 않은 경찰이지만, 김우현을 만나면서 점차 성장한다. 이연희씨가 그 과정을 연기하면서 배우로서도 성장하길 바란다."

―매회 대본을 마감할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책상 앞에 붙여놓은 '유령' 포스터를 본다. 제작진 60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저들을 실망시키지 말자'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