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금융 범죄 형량

2009년 6월 미국 뉴욕 맨해튼 연방지방법원 법정의 풍경이다. 650억달러(74조원)에 달하는 다단계 금융 사기를 저지른 버나드 메이도프가 재판장의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찰은 그에게 징역 150년형을 구형했다. 그의 변호인은"메이도프가 71세라는 고령임을 감안해야 한다"며 징역 12년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잠시 뒤 법정으로 들어온 데니 친 판사는 "메이도프 사건은 선량한 사람들의 '신뢰의 가교(架橋)'를 깬 범죄"라며 검찰 구형대로 징역 150년을 선고했다.

▶메이도프는 고수익을 미끼로 투자자를 유인한 뒤 나중에 투자하는 사람한테서 받은 돈으로 앞서 투자한 사람에게 수익을 지급하는 돌려막기 수법을 썼다. 2008년 금융 위기 때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되돌려달라고 몰려드는 바람에 16년 만에 사기 행각이 들통 났다.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했던 데니 친 판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메이도프의 11개 범죄에 대한 형량을 하나씩 더해보니 150년이 나왔다"며 "중대한 범죄는 중대한 처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대로 선고했다"고 말했다.

▶미국 법원이 증권·금융 범죄에 중형을 선고한 사례는 메이도프만이 아니다. 70억달러(약 8조원)의 금융 사기극을 벌인 앨런 스탠퍼드 전 스탠퍼드인터내셔널은행 회장은 징역 110년, 100억달러의 회계 부정을 저지른 통신업체 월드컴 대표 버나드 에바스는 징역 25년, 분식 회계를 한 에너지 기업 엔론의 대표 제프리 스킬링은 징역 24년을 선고받았다.

▶우리나라 법원은 회사 돈 수천억원을 횡령·배임한 기업인들에게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했다가 2심에선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으로 풀어주는 게 공식처럼 돼 있다. 이들은 얼마 뒤엔 사면·복권을 받아 완전 자유인이 된다. 대법원 양형(量刑)위원회가 엊그제 증권·금융 범죄의 형량을 지금보다 높이는 양형 기준을 마련했다. 미공개 정보로 주가를 조작할 경우 이득액이 50억원 이상 300억원 미만이면 징역 5~9년, 300억원 이상이면 7~11년을 기본 형량으로 삼도록 했다. 회계 부정은 기본 형량을 8개월~1년 6개월로 정했다.

▶그러나 새로운 양형 기준도 미국에 비하면 여전히 가벼운 편이다. 증권·금융 범죄는 수많은 개미 투자자를 울리고 자본시장의 근본을 흔드는 중대 범죄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분식 회계, 주가조작 같은 범죄는 국가 경제를 무너뜨리고 막대한 국민 세금을 쏟아붓게 만드는 반(反)국가적 악성 범죄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우리도 금융·증권 범죄에 대한 형량을 더 무겁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