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영화 20년] 마케팅·투자 첫 도입(결혼 이야기, 미스터 맘마)… 1992년, 한국영화엔 혁명

'한국 영화사는 1992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대부분 영화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해에 한국에선 처음으로 기획영화 형식의 '결혼 이야기'와 '미스터 맘마'가 개봉됐다.

'기획영화'란 감독의 주제 의식보다는 제작자나 기획자의 아이디어가 중심이 되는 영화다. 특정 관객층의 취향이나 기호를 분석해 영화 제작 사전 단계에서 이를 반영, 기획해 만든 '관객용 맞춤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기획영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대기업 자본이 영화계에 들어왔고, 이후 20년간 대부분 상업 영화들이 이런 기획 단계를 거쳐 만들어지게 됐다. 유지나 동국대 영화과 교수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 상업 영화에 '기획영화'라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 것"이라고 했다. 본지는 21일 '기획영화' 탄생 20년을 맞아 당시의 주역인 유인택(57) 서울시뮤지컬 단장과 김의석(55) 영화진흥위원장, 신철 신씨네의 대표(54) 대담을 마련했다. 김 위원장과 신 대표는 각각 '결혼 이야기'의 감독·제작자이고, 유 단장은 '미스터 맘마'를 제작했다.

―왜 '결혼 이야기'를 기획영화의 시작으로 보는 건가.

유인택 "그 이전까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문예 영화 위주여서 감독이 베스트셀러 소설 하나 잡아서 '이거 하자'고 영화사를 찾아가는 식이었다."

김의석 "결혼 이야기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제작자가 기획을 하고 감독과 배우, 투자까지 다 끌어왔다."

신철 "당시 '결혼 이야기'의 흥행은 지금의 1000만 관객 동원과도 같은 수준이었다."

―'결혼 이야기' 제작 과정은 이전과 구체적으로 뭐가 달랐나.

신 "기획 단계에서 3~4년간 신혼부부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거기서 나온 에피소드로 시나리오를 쓰고 그걸 갖고 매일 밤마다 회의를 하며 시나리오를 고쳤다. 영화 마케팅의 개념도 없었을 땐데, 그때 시작 단계서부터 마케팅 기획을 했다. 심재명(현 '명필름' 대표), 오정완(현 영화사 '봄' 대표), 고(故) 정승혜씨 등이 당시 이런 부분을 담당했다."

유 "지금은 일반화했지만 대기업(삼성영상사업단)에서 투자를 받은 첫 상업영화다. 당시 비디오데크가 보급되는 시기였는데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그들도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니 영화 콘텐츠에 눈을 돌리게 된 거다."

김 "내가 가장 먼저 한 게 (본영화가 아닌) 예고편 촬영이었다. 그전까진 예고편을 NG필름을 모아 만들었는데 마케팅을 위해 예고편을 따로 만들었다."

―타깃을 신혼부부로 삼은 이유는.

신 "영화의 주요 관객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이다. 이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게 바로 연애고, 결혼이다. 게다가 커리어 우먼이 등장하고 남녀평등이 이뤄지는 등 사회변화가 있었다."

유 "'결혼 이야기' 전까지는 영화에서 한(恨) 많고 기구한 여자나 여러 남자를 만나는 여자들이 주인공이었다. 영화가 사회를 못 따라간 것이다."

―'기획영화' 제작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신 "극장에서 근무하던 시절 AFM(아메리칸 필름 마켓)에 갔는데 사람들이 영화의 예고편과 기획만 보고서 영화를 사고팔더라. 그땐 영화를 하나의 상품처럼 사고파는 게 이상해 보였다. 그러다가 할리우드 얘기도 듣고, 광고기획사에 있는 사람들한테 광고 만드는 얘기도 들으면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김 "임권택 감독님 밑에서 조연출을 하다가 광고기획사에 들어가 일을 했는데, 그때 경험이 기획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됐다. 광고회사에선 대중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곳이니까 영화에서도 그걸 적용하기가 수월했다."

―제작방식을 왜 바꾸려고 했나.

신 "당시 영화계에 두 가지 이슈가 있었다. '스크린 쿼터 사수'와 '외화 직배 반대'다. 그런데 투쟁이 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선뜻 돈 내고 볼 만한 한국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뭘 원하는지 찾기 시작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유 "새로운 한국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나 사명감도 있었다."

신 "우리로선 '문화운동'을 한 셈이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난 대학(서울대 미학과) 재학 중에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피카디리 극장 매표창구에서도 일했는데 그땐 영화가 개봉하면 감독이나 제작자가 와서 흥행 여부를 살폈다. 영화가 망해 그 자리에서 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수익을 내는 한국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유 "신 대표가 제작자로서 처음으로 영화를 비즈니스와 접목시킨 것이다."

―한국 영화에 미친 영향은.

신 "세대교체를 했다. 새로운 세대들이 '한국 영화도 볼 만하다'는 생각을 관객에게 심어줬다."

유 "김의석 위원장이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영화 아카데미 1기 출신이다. 그때부터 연출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젊은 감독들이 대거 나오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반응은 없었나.

신 "선배들한테 욕을 많이 먹었다. 일자리를 빼앗았다고."

김 "스승인 임권택 감독님처럼 예술 영화 같은 걸 안 하고 코미디를 하니까 좀 부끄러웠다. 같이 공부를 하던 동료들은 나보고 '팔려갔다'고도 했다."

―이제 20년이 지났다. 아쉬운 점은 없나.

신 "제작자나 제작사들이 (자본을 대는) CJ E&M이나 롯데엔터테인먼트에 필적한 힘을 갖고 커왔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김 "SM엔터테인먼트처럼 K팝을 이끈 매니지먼트사들은 그렇게 성장했는데…부럽다."

유 "영화계에 경영 마인드가 부족했던 것 같다. 지금은 제작자 기능이 축소되고 대기업의 하도급업자 구실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