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클래식] 그 섬엔 크루소와 나만 있어야 해… 프라이데이(크루소가 구해준 흑인)가 왜 나오는 거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 아닐까 싶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은 이상하게 어둑한 느낌이었다. 책가방을 아무 곳에나 던져두고 나는 누나의 책꽂이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꺼내 든다. 그러고는 더욱 어두운 책상 밑으로 들어간다.

초반에는 자기소개와 항해를 떠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의 반대를 거역하고 경솔하게 행동한 젊은 날을 반성하는 부분이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건너뛴다. 이미 수십 번도 더 읽은 책이어서 단번에 시작할 부분을 펼칠 수 있다. 내가 읽기 시작하는 부분은 배가 좌초하는 시점이다. 나에게 로빈슨 크루소의 시작은 여기부터다.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표착하였음을 깨달은 주인공이 절망에 빠지는 부분은 미소를 지으며 읽어 준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다. 곧이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로 로빈슨 크루소가 타고 왔던 배가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좌초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부분이다.

가뜩이나 어두운 집안에서도 가장 어두운 책상 밑에서 나는 즐거움에 얼굴이 벌게진다. 그 즈음이면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음대를 지망하던 누나는 과제곡인 듯 같은 곡을 계속 반복해서 친다. 틀린 부분을 또 틀리고 어려운 부분은 몇 번이고 수정하면서 치고 또 친다. 나는 그 멜로디를 들으며 크루소가 좌초된 배에서 물건들을 실어 나르는 부분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 내린다. 우선 그는 빵과 화란제 치즈, 양고기 말린 것 등 음식물을 챙긴다. 그러곤 감로주와 색크주, 럼주 같은 술을 싣는다. 한 번도 먹어보지도, 마셔보지도 않은 그 음식의 이름을 음미하며 맛을 상상해본다. 그러곤 그가 찾아내는 모든 물건들, 옷과 탄약, 총, 식기류 등의 수확을 마치 내 일처럼 즐거워하며 뿌듯해한다. 같은 부분을 읽고 또 읽는 것이다. 마치 누나의 연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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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나는 완전히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가 거처를 만드는 과정, 섬을 파악하기 위해 떠나는 위험한 탐험, 원시의 땅에서 하나하나 생필품을 창조해 나가는 과정, 경작과 가축 사육, 섬의 자연에서 누리는 그만의 쾌락에 나는 마치 그 모든 전개 현장에 있는 것처럼,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흥분하고 성취감을 느끼면서 읽어 나간다. 그런데 그의 섬 생활이 풍요롭고 안정되어가면서 나의 열기는 반대로 조금씩 식어간다. 날이 어두워져 책을 읽기 어려워지는 까닭도 있지만 사실은 더 큰 이유가 있다. 식인종들이 포로를 잡아와서 불에 구워 먹는 부분에 이야기가 도달한 것이다. 잔인하거나 충격적이어서 내 열기가 식은 건 아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와 나 둘만 있던 섬에 외부인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곧 프라이데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카니발의 재료로 잡혀온 흑인을 그가 살려주면서 그 흑인이 그에게 평생 복종을 맹세하고, 그는 흑인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그를 노예이면서 친구, 가족으로 삼아 새로운 생활의 장을 연다. 이 부분에 이르면 난 미련 없이 책을 덮는다.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면 그건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다. 아무런 매력이 없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게다가 프라이데이처럼 절대 복종하고 충성하는 캐릭터라면 더더욱 그렇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섬엔 그와 그를 지켜보는 나, 둘만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다시 누나의 책꽂이, 같은 곳에 똑같이 꽂아 둔다. 내일을 기약하면서. 그렇게 배의 좌초부터 프라이데이가 나타나는 부분까지만을,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 않은 것 같다. 이후 이십대와 삼십대, 사십대를 보내면서 한 번도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 않았다. 심지어는 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의 한구석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발견하고, 홀린 것처럼 사게 됐다. 다시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영화 시사회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배우들과 제작자, 투자자, 감독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서로에게 덕담과 칭찬과 너스레를 던지는 그런 흥겨운 자리였다. 서로 상대와 일해보고 싶다고, 저번 영화 굉장했다고, 넌 최고라고 서로 치켜세우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고 말았다.

"난 이상하게 이런 날 집에 돌아가서 자리에 누우면 너무 허무해. 이런 대화들, 이런 관계들이 너무 헛되고도 헛되어서 빈 껍질만 집에 돌아온 것 같아서 괴로워"라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이었다. 어떤 어려운 촬영도, 어떤 세상의 비난과 개인사의 고통에도 끄떡 않는, 강철 같은 배우와 감독들이 아무도 말도 못하고, 목이 메어서 자기 잔만 내려다보는 것이다. 나도 말을 더 못하고 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는다. 책상 속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커버린 덩치이기에, 나는 침대에 누워 로빈슨 크루소를 펼쳐든다. 좌초하는 부분을 펼쳐서 읽기 시작한다. 프라이데이가 나올 때까지.

140자 트윗독후감

"30대가 된 지금도 무인도에 갇힌 나를 떠올리며, 또 힘들 때마다 로빈슨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을 때가 있습니다."(페이스북 응모자 S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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