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세상읽기] 지친 사람들 치유하는 계족산 14.5㎞ 황톳길

오후 6시 반, '황혼(黃昏) 산행'을 하기에 제격인 시간이다. 시간에 지쳐 벌건 몸을 드러낸 채 서쪽으로 넘어가는 폭양(曝陽)이 마지막 용을 쓰듯 황토(黃土)를 비추고 있다. 아예 선홍빛으로 변한 그 흙을 맨발로 밟는 느낌이 색다르다.

밤 8시가 넘도록 산은 훤하다. 흙과 벚나무가 떨군 버찌를 뭉개며 계속 오른다. 제 먹이를 빼앗긴 다람쥐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하산길에 지하수로 붉게 변한 발을 씻자 쾌감이 밀려오더니 전신에 열(熱)이 슬그머니 퍼져온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계족산(鷄足山) 자락 14.5㎞에는 황톳길이 나있다. 본시 이 지역 땅의 맹주는 계룡산(鷄龍山)이다. 해발 400m에 생긴 게 닭발 같다는 계족산은 명산 축에도 못 끼었다. 그랬던 이 산에 2007년부터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 유래가 '술꾼'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그것도 기연(奇緣)이다. 조웅래(趙雄來·53) 에코힐링 선양 회장은 삼성반도체통신과 LG정보통신에 다니던 샐러리맨이었다. 1992년 웅지(雄志)를 품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끝났을 팔자였다. "이대론 미래가 없다"는 절박감이 '오늘의 운세'를 전화로 알려주는 사업과 음악 메시지를 친구나 애인에게 전해주는 서비스로 이어졌다. 지금 보면 별것 아닌 아이디어가 대박을 쳤다. 그는 그게 '벤처사업'이라고 강변한다.

떼돈 벌어 그가 사들인 회사가 선양소주였다. 한때 대전·충청의 패자(覇者)였지만 거대 소주 회사에 밀려 시장점유율이 뚝 떨어진 차였다. 덥석 인수하자 그를 기다리는 일과가 술 마시고 해장한 뒤 주독(酒毒)을 푸는 것이었다.

그래서 2006년부터 계족산에 오르던 어느 날이었다. 고향 친구를 부부 동반으로 불렀는데 여성들이 개념 없이 뾰족구두를 신고 온 것이었다. 기사도(騎士道)를 발휘한다고 자기 운동화를 내준 뒤 맨발로 걷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처음에는 지렁이를 밟는 것 같더니 이내 전신이 후끈거렸다. 집에 돌아와 난생처음 숙면(熟眠)도 취했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그는 선언했다. "계족산에 황토를 뿌리자!" 맨땅을 걷는 것도 이렇게 좋은데 그 위에 황토를 뿌리면 얼마나 더 좋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임원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양반 술이 덜 깼군' '돌았나?'

계족산 둘레길 14㎞를 황토로 뒤덮는데 덤프트럭 100대가 필요했다. 비가 오면 휩쓸려나가는 황토는 다시 메워야 했다. 그게 다 돈이었다. 처음엔 충청도 황토를 썼는데 아무래도 제빛이 아닌 것 같아 전북 김제 쪽 황토를 쓴다. 2007년부터 이런 황당한 일을 하는 데 40억원이 넘게 나갔다. 벌레가 등산객을 괴롭힌다는 소식에 곳곳에 끈끈이 테이프를 감았다. 화장실을 세우고 등산객들이 심심할까봐 미술 '작품'도 내걸었다. 그의 회사엔 '황토 담당 임원'도 있다. 얼마 전부터는 '뻔뻔(Fun fun)한 음악회'를 매주 토·일요일에 연다.

계족산에는 조 회장의 땅이 한 평도 없다. "다 내 땅인 줄 아는데 굳이 사서 뭐합니까?" 40억원을 들여서 단 한 푼도 수익이 없으니 법정(法頂) 스님이 말한 '무소유(無所有)'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천안·아산까지 퍼져나간 '조웅래식(式) 황톳길'에서 그가 땀만 흘린 건 아니다. 인간이 땅을 위하면 땅은 인간에게 뭔가를 베푸는 모양이다. 넘치는 주폭(酒暴)에 침묵하며 술 팔아먹기에 바쁜 여느 술 회사 오너들과 달리 그는 뭔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조선일보 주폭 시리즈도 있지만… 저도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왜 사람들은 제 주량(酒量)을 넘어서 남들이 주는 대로 마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술의 주도권을 자기가 쥘 수 있다면 무리하지 않고 다음 날 계족산 걷는 것으로 족할 텐데."

그래서 그는 최근 출시한 위스키 '맥키스(MACKISS)'의 도수를 21도로 낮췄다. 40도가 넘는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켜다 다음 날 고생하지 말고 가볍게 다른 음료와 한 잔 섞어 기분을 푸는 정도에 그치도록 만들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술이 과연 조 회장의 의도대로 주폭을 줄이는 데 일조할지는 알 수 없으나 계족산이 내린 '계시'임에 분명하다.

몇 년 지나면 그가 아예 에코 힐링(Eco-healing·자연 치유)으로 기업을 바꿀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기울인 술잔이 쌓여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새벽빛이 창틈으로 스며들 즈음 다시 계족산이 부르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다시 오른 산은 가파르지 않았다. 짧은 비탈 뒤에 긴 능선이 이어져 홀로 걷기에, 가족끼리 이야기 나누기에도 편하다. 조 회장은 "학교 폭력 일으킨 아이들이 이 길을 걸으면 달라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을 성싶었다.

여명(黎明) 속 살갗에 닿는 황토의 느낌은 저녁과 또 달랐다. 왕복 6㎞ 산행을 마치고 내려올 때쯤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하산 중"이라는 말에 조 회장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터트린 웃음이 휴대전화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