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다른 나] '옛 그림 읽어주는 남자' 손태호(44) ㈜선유 이사

저는 원래 우리나라 문화 유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주말이면 함께 전국 각지의 문화유산을 찾아 답사를 하곤 했지요.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그림으로 옮아간 건 200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2005년 봄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봄 전시에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를 만났습니다. 바위 틈새에 패랭이꽃과 제비꽃이 피어있는데, 노란 줄무늬 고양이가 나비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책에서 여러 번 보고 좋아하던 그림이었는데, '진짜'가 주는 감동은 역시 달랐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옛 그림을 보러 다녔습니다. 좋은 전시가 있는 전국 박물관·미술관을 찾아다녔고, 서울 인사동 화랑과 삼청동 갤러리도 몽땅 뒤졌지요. 그렇게 해서 옛 그림을 보다가 본격적으로 자료를 찾아가며 혼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지식을 남들과 나누고 싶어 인터넷 블로그도 개설했지요. 인터넷상에서 제법 인기를 얻게 되자 '독학(獨學)의 한계'를 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문화 유적에 관심이 많던 나 여행사 다니다 김홍도 그림 접해

자료 몽땅 뒤지며 고미술 늦공부 블로그 운영하다 대학원 진학

회화 책 출간하고 기업체 강의도 여행 인솔 중 전문 설명도 내 몫"


지난 2월 책을 한 권 냈습니다. 제목은 '나를 세우는 옛 그림'으로 단원 김홍도, 공재 윤두서,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 등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에서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찾아보는 에세이집입니다. 저는 41세 때인 2009년 동국대 미술학과 불교미술 과정에 입학했고, 지난해 조선 후기 조각승(彫刻僧)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조선시대 그림에 관한 책을 내고, 조선시대 불교미술로 논문을 썼다니 사람들은 종종 저를 전업(專業) 학생이나 연구자로 생각하지만, 사실 본업(本業)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여행사를 운영합니다.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친구와 함께 인도·서역 전문 여행사를 경영하고 있지요. 고객을 만나서 상담하며 여행 스케줄을 짜 주고, 비용을 계산하는 게 주업무입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직접 여행단을 인솔해 중국·인도로 출장을 가기도 합니다. 대학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을 졸업한 1994년 여행사에 들어갔습니다. 장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물리학보다는 자유로운 여행업에 끌렸습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캐나다항공 승객 담당 영업부에서 근무했고, 이후 다시 여행사에서 일했습니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학술 답사, 성지 순례 전문 여행사를 연 것은 2010년 3월입니다.

반 고흐, 피카소, 르누아르 등 서양 유명 화가들의 명화(名畵)를 다 놓아두고 왜 하필 우리 옛 그림이 좋았냐고요? 그림이 전해주는 따뜻한 인간성과 그를 그려낸 화가들의 삶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옛 그림을 만나던 무렵 저는 몹시 힘들었거든요. 사람보다 돈이 귀하게 여겨지는 세태와 끊임없이 경쟁으로 내몰리는 현실에 지쳤지요. 스트레스가 계속되다 보니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그때 우리 옛 그림을 만났습니다. 말 그림에 능했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 1715)에게서는 중년 선비의 자신감을 배웠습니다. 정치적으로 봉쇄된 남인 선비인 그는 정치적 입지를 세우는 것보다는 예술과 학문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부단한 노력으로 그 꿈을 이루어가는 윤두서를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 꼭 한 가지만은 아니구나. 사람이 자기 책임을 다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몰락한 역적 집안의 자손이었습니다. 스스로 좌절하고 인생을 망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대신 그림에 삶의 모든 의미를 부여했지요.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이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초라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술의 힘'이란 바로 그런 거겠지요.

책을 내자 기업체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고, 사보(社報)에 칼럼도 쓰게 되었어요. 이 모두가 우리 옛 그림이 제게 준 선물입니다. 저녁 8~9시쯤 회사에서 퇴근하면 그림 관련 책과 자료를 읽으며 자정 넘어까지 공부합니다.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여행업의 보람인데, 일이 되다 보니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 있더군요. 그림 공부를 하고 대학원에 다닌 영향으로 학술 답사 전문 여행사를 열게 되었고, 인솔자로 나설 때도 더 전문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인 셈입니다.

만일 누가 '네 인생에서 미술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설렘'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뛰어나게 조각된 불상(佛像)이 안치된 법당에 들어설 때면 저 멀리서부터 가슴이 뜁니다. 추사(秋史)나 겸재(謙齋)의 그림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작품이란 '내가 저걸 보면 분명히 행복해질 거야'라는 기대감을 항상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옛 그림 속 불상·사찰·탑 등을 정리해 조선시대 회화와 불교의 연결 고리를 밝히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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