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작은 역사책, 우표

요금을 냈다는 표시로 침을 발라 붙이는 가로세로 3㎝ 내외의 작은 종이. 우표(郵票)다. 그러나 30년 넘게 우표를 모아온 일본인 나이토 요스케(內藤陽介·45·사진)는 이렇게 정의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우표에는 정치적 정통성과 정책, 이데올로기가 새겨진다. 우표를 살피는 건 동시대의 모습과 역사의 흐름을 간접 체험하는 일이다."

◇우표에 드러난 한국 현대사

초등학생 때부터 우표를 수집한 나이토씨는 도쿄대 문학부(이슬람학 전공)를 졸업한 후에도 우표에만 '올인'했다. 날마다 12시간씩 인터넷으로 우표를 사들이고, 역사를 공부했다. 2001년 국제우취연맹(FIP)이 주최하는 세계우표전시회에서 일본인 최초로 주제별 우표 수집 분야의 금상을 받았고, 현재 아시아우취연맹(FIAP) 심사위원. '외국 우표에 그려진 일본' '우표와 전쟁' 등 일본에서 낸 책만 20여권.

그가 쓴 책 두 권이 한국의 두 출판사에서 동시에 번역·출간됐다. 두 출판사 모두 일본 서점에 들렀다가 그의 책을 발견하고 번역하기로 했다. 작은 상징(우표)을 통해 한국사라는 큰 주제를 해석하는 일본 사람에게 한국의 두 출판사가 동시에 '꽂힌' 것이다. '우표로 그려낸 한국현대사(한울아카데미)'는 광복 이후부터 이명박 대통령 취임 때까지 한국(북한 포함)에서 발행된 우표 181장을 키워드로 관련 한국사를 시대순으로 보여준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정은문고)'는 한국·베트남·이란·쿠바의 우표 232장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분석했다.

◇우표로 보는 남북한 차이

그가 수집한 우표를 통해 한국인도 잘 몰랐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남한의 첫 우표가 나온 것은 1946년 5월. 광복 후 8개월간이나 일제가 만든 우표를 썼다. 일본 우표 사용금지는 6월 30일 내려졌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10일 북한은 서울 점령을 자축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1950.6.28'이라는 날짜와 함께 서울 중앙청에 인공기가 펄럭이는 그림이다. 전쟁 발발 보름 만에 기념우표를 발행한 것. 나이토씨는 "북한이 사전에 우표 발행을 준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25전쟁이 북한의 소행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사례"라고 풀이했다.

"우표는 북한처럼 정보가 차단된 국가의 현황을 추적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북한 우표의 특징은 반미와 체제 찬양. 북한의 첫 번째 반미 우표는 1952년 6월 4일 발행된 '미제 반대 투쟁의 날'이다. 이후 1970년대까지 반미 우표 시리즈를 대대적으로 발행했다. '양키, 이놈''세계 도처에서 미제의 각을 떼내자!'는 섬뜩한 구호도 담겨 있다.

1960~70년대를 지나면서 남한 우표에는 경제 발전 성과가 담겼다.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수출 100억달러 돌파, 서울올림픽 개막, OECD 가입 등 기념할 일을 우표에 남겼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은 '조국 통일 5대 방침', '조선노동당 30주년 기념' '대포동(미사일) 발사' '문익환 목사·임수경 방북' 등의 우표를 발행했다.

우표엔 잊고 싶은 일도 남았다. 2005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황우석 사태가 대표적이다. 그해에 발행된 인간 복제 배아줄기세포 배양 성공 기념우표는 이듬해 '최고 과학자' 칭호를 박탈하면서 우정사업본부에 의해 판매가 중지됐고 잔량은 전부 회수됐다.

◇우표에 빠진 이슬람학 전공자

나이토씨는 도쿄대 강사를 지내다 '교수' 제안도 받았지만 마다했다. 전 세계 우표를 사들이고 강연을 다니려면 일년에 절반은 해외에 나가 있어야 하기 때문. 당연히 처음엔 가족이 반대했다. 하지만 유명해지면서 인세와 강연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우표 구입비(1년에 약 1500만원)를 상쇄하고도 남자 가족들 잔소리가 바뀌었다. "희귀 우표를 더 수집해 잘 팔리는 책을 써라."

그는 '북한사전: 우표로 알아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쓴 적이 있다. "'우표'를 통해 '역사의 그림책'을 한국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어 기쁩니다." 나이토씨는 다음 달 9~13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2012 대한민국 우표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