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20] 수퍼영웅도 돈 벌고 연애하고 싶다

여기 한 청년이 있다. 이름은 피터 파커. 어디 데려다 놔도 눈에 띄지 않는 작고 평범한 체구, 가난한 주머니,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거미에게 물리고 나서 이상해졌다.

눈을 떠보니 별안간 나에게 강력한 초능력이 생겨 있다면 어떨까? 이 거대한 사회에서 자신이 얼마나 미미하고 무력한 존재인지 아프게 절감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몰래 품어봤음 직한 꿈이다. 미국 만화책 마블코믹스의 만화 캐릭터를 스크린에 옮겨온 '스파이더맨(Spider-Man)'의 피터(토비 맥과이어)는 얼떨결에 그 꿈을 이루게 된 주인공이다.

어쩌다 보니 초능력을 가지게 된 피터는 처음엔 마냥 신기해한다. 제 능력을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모른다는 뜻이다. 그가 처음으로 초능력을 발휘하는 곳이 사설 레슬링 대회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짝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동차를 살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의 일이라고만 여기며 못 본 척 지나쳤던 괴한에 의해 아버지 같은 삼촌이 살해당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에 빠진다. 삼촌이 남긴 유언,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문장은 이제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사적인 욕망과 공익 사이의 역할 갈등은 이 시리즈 내내 계속되는 스파이더맨의 숙명이다. 그가 스파이더맨의 가면을 썼을 때 세상의 모든 악(惡)을 응징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영웅이다. 모든 시민들이 그를 믿고 사랑한다. 그렇지만 가면을 벗으면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남들처럼 학교도 다녀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연애도 해야 하는데, 악인들은 영웅의 개인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고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것이다. 대의명분을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개인적인 실속과는 거리가 먼 삶, 인간 피터 파커의 생활은 그래서 늘 고달프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불안감, 개인을 희생하며 꼭 정의의 수호자로 살 필요가 있는가 하는 번민에 시달리다가도 사이렌이 울리면 또다시 거미옷을 뒤집어쓰고 밤하늘을 가르는 남자, 스파이더맨. 그는 '너무도 인간적인' 수퍼히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