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등 로맨틱 코미디 대가

연인들의 심리를 세밀하면서도 산뜻하게 그려낸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을 쓰고 제작했던 미국의 감독·제작자·시나리오작가 노라 에프론(Ephron·71)이 26일 세상을 떠났다. 외신들은 이날 에프론이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인한 폐렴 증세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1941년 영화작가 부부에게서 태어난 에프론에게는 영화제작자·감독·프로듀서·작가·언론인 등 숱한 직함이 따라붙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다. 에프론은 1980~9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로맨틱 코미디 선두 주자였다. 1983년 '실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 1992년 '디스 이즈 마이 라이프'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가 직접 메가폰을 잡거나 제작·각본을 맡은 작품은 2009년 '줄리 줄리아'까지 모두 15개다. 메릴 스트립(줄리 줄리아)·빌리 크리스탈(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톰 행크스(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할리우드 톱스타들 이름이 그의 필모그래피(영화 목록)와 궤적을 같이한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은 여배우 맥 라이언이다. 라이언은 에프론이 각본과 제작을 맡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감독까지 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유브 갓 메일'(1998)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며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막강 파워'로 에프론과 더불어 승승장구했다.

에프론은 작품 속에서 심리 차이나 감정의 흐름을 그려내는 데 능했다. 특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두 주인공이 '남녀 간 우정이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설전을 벌이는 것이나 서로의 연애상담을 해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는 부분에서 그가 가진 로맨틱 코미디 재능이 유감없이 빛났다. 샐리(맥 라이언)가 식당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척하는 장면이나, 해리(빌리 크리스털)의 "내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인 너를 사랑해" 같은 명대사도 그의 솜씨다. 하지만 '실크우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세 차례 도전했던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에프론은 세 번 결혼했다. 그 중 두 번째 남편이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유명한 워싱턴포스트 기자 칼 번스타인. 그러나 둘째 아들을 임신 중이던 1979년 에프론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됐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트번'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이 소설은 잭 니콜슨·메릴 스트립 주연 영화 '제2의 연인'(1986)으로도 만들어졌다. 에프론은 시나리오 작가인 세 번째 남편 니콜라스 필레지와 20년 넘게 뉴욕에서 생활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은 이날 "뉴욕의 예술과 문화에 큰 손실을 입었다"며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